[理知논술/고전여행]헤르만 헤세 ‘환상동화집’

  • 입력 2007년 4월 3일 03시 01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가와 딱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어떤 소원을 빌겠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척 마음이 설레겠지요? 단 한 가지 소원뿐이라니 무엇을 말해야 할지 갈등도 생길 겁니다. 잠시 시간을 줄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나요? 헤르만 헤세의 동화 ‘팔둠’에는 아주 특이한 소원을 말한 사람이 있답니다. 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팔둠 시에는 일 년에 한 번 장이 섭니다. 장이 서는 바로 그날 이 도시에 어떤 이방인이 찾아옵니다. 이 나그네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지요. 사람들은 앞 다퉈 자신의 소원을 빌었습니다. 광장의 분수를 와인으로 바꿔 달라, 부자가 되게 해 달라, 어여쁜 머리를 갖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놀랍게도 팔둠 시에 사는 모든 사람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한 사람은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인생과 변치 않는 진리를 탐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소원을 이뤄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뒤늦게 나그네 앞으로 나아갑니다. 먼저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청년이 소원을 빌었습니다. 온 세상의 소음이 접근할 수 없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청년의 소원은 이루어져서 그는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대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청년은 절망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해 준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와 연주자가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는 나그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원 하나를 빌었지요.

“나는 인생에서 보고 듣는 것과 불멸의 것을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소. 그러니 팔둠 만큼 크고 그 꼭대기가 구름 위까지 치솟는 높은 산이 되고 싶소.”

소원대로 청년은 산이 되었습니다. 산이 된 청년은 마을을 굽어보면서 세월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있던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낡아버릴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날에 나타났던 나그네의 이야기가 그저 전설이 될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산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나 모습이 달라지고 도시가 쇠퇴해 갈 때에도 청년은 산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은 자신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변해 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협곡에선 1000년 동안 자란 수정이 계속 커 가고 있었고, 돌은 풍화되었으며, 시내와 폭포는 점점 넓게 파고들어왔습니다. 자신의 눈과 같은 푸른 호수는 흐릿하고 무거워져 늪과 습지로 변했습니다. 산은 자신 역시 팔둠처럼 소멸해 가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불멸의 진리를 영원히 탐구하려고 했던 산은 자신의 소멸 앞에 그만 두려워졌습니다. 산이 서서히 닳아 없어지려는 순간 나그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는 윙크하며 물었습니다.

“소원 하나를 말해 볼래?”

나그네에게 소원을 빈 산은 허물어져 바다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고통과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산이 빈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청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소원이 바로 산이 되는 것이었지요.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고 지켜 볼 수 있는 커다란 산이 된다면 그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 산조차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산도 소멸 앞에서 고통스러워했으니까요. 그가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룬 것은 삶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때, 다시 말해 소멸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멸은 아무 의미 없는 사라짐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거지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워지고자 하는 ‘갈망’이 필요합니다. 산이 된 청년이 ‘소멸’을 ‘갈망’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팔둠 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많은 소원을 품고 살아가지요. 이처럼 무언가를 소망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자기를 찾는 과정 속에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요? 조금 더 높은 성적, 조금 더 멋진 외모, 조금 더 나은 지위를 바라는 모든 소원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욕망인 것이지요. 하지만 소원 한 가지를 이룬다고 해서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산이 되고자 했던 청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완성하는 것은 끊임없는 소원을 이루고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는 그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요?

헤르만 헤세의 동화 ‘팔둠’은 유년기의 소멸 과정을 거치고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여러분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는 여러분, 다른 메시지를 찾아 환상의 동화 ‘팔둠’을 한 번 펼쳐 보길 바랍니다.

한선영 학림 필로소피 논술 전문 강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