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신문 상대 법적대응 남발에 제동

  • 입력 2006년 2월 1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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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나 기관은 반론보도를 청구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보도에 대해 반론을 제한 없이 허용하면 언론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될 수 있다. 신문 지면이 반론보도로 얼룩져 지면의 완결성이 훼손되고 신문에 대한 독자의 신뢰가 크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옛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정간법)’은 제16조 1항에서 ‘사실적 주장에 관한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경우에 반론보도를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반론보도의 대상을 ‘사실적 주장’에 국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적 주장’이 아닌 ‘의견 표명’ 등은 반론보도의 대상이 안 된다.

정간법은 지난해 7월 폐지됐지만 이 조항은 새로 제정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제16조 1항에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적 주장’ 기준 없어 반론보도 홍수=‘사실적 주장’과 ‘의견 표명’은 어떻게 다른가. 예를 들어 ‘A 장관은 술만 마시면 성희롱을 해 장관 자격이 없다’는 표현과 ‘A 장관은 품위를 지키지 않아 장관 자격이 없다’는 표현을 비교해 보자.

앞의 표현은 ‘술만 마시면 성희롱을 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장관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사실적 주장’에 해당한다.

뒤의 표현은 단순한 의견 표명 또는 비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판례는 명확한 기준이 없이 ‘사실적 주장’을 폭넓게 해석해 웬만한 반론보도 청구는 다 받아들였다.

문제가 된 동아일보와 국정홍보처 사건에서도 언론중재위원회와 1, 2심 재판부는 신문 사설마저도 ‘사실적 주장’에 해당한다며 반론보도를 해주라고 판결했다.

다른 언론보도 사건에서도 법원은 거의 같은 태도를 취해 왔고, 이로 인해 정부기관과 정치인들의 반론보도 청구가 홍수를 이뤘다.

▽“반론보도 청구 남용 막는 기념비적인 판결”=대법원은 ‘사실적 주장’과 ‘의견 표명’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하고 명확하며 외부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을 사실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도 명확한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사실적 주장과 논평이 섞여 보도되는 것이 보통”이므로 보도의 전체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원래의 보도와 이 보도로 인해 피해를 봤다며 청구하는 반론보도문을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앞의 ‘A 장관’ 사례를 적용해 살펴보자. 만일 A 장관이 ‘장관 자격이 없다’는 표현에 대해 반론보도를 요청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본래의 보도는 의견 표명에 해당한다. 대신 A 장관이 ‘술만 마시면 성희롱을 한다’는 표현을 문제 삼는다면 ‘사실적 주장’에 대한 반론보도 청구에 해당한다.

숭실대 법대 강경근(姜京根·헌법학) 교수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반론보도 청구가 허용되는 ‘사실적 주장’을 확대해석하지 못하도록 못 박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현 정부 들어 공공기관이 사설과 칼럼에 대해서까지 반론보도 청구를 남발해왔다”며 “이번 판결은 언론피해 구제도 중요하지만 언론 자유의 가치가 더 소중함을 인정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언론 자유에 관한 기념비적인 판결”이라며 “하급심 판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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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부 27건→DJ정부 118건→ 盧정부 495건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국가기관의 언론중재 신청은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본격화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이후엔 중재신청이 일상화될 만큼 급증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5년 동안 27건에 불과했던 중재신청은 DJ 정부 때 118건으로 크게 늘어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2003년 159건, 2004년 190건, 2005년 146건 등 3년간 495건이나 됐다.

정부의 중재신청은 동아일보 등 일부 비판적인 신문에 집중됐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2004년 말까지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중재신청 349건 중 동아일보에 대한 신청이 37건으로 가장 많았다.

단순히 중재신청 건수만 는 것이 아니다. 사실보도에 대한 이의 제기를 넘어 사설이나 칼럼 등 ‘의견기사’에 대해서까지 중재신청을 하는 등 대상 범위가 넓어졌다.

이번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의 경우도 2001년 당시 국정홍보처가 ‘처장의 잦은 성명 발표’라는 본보의 사실 전달 기사뿐 아니라 그런 행태를 비판하는 사설까지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사설이나 칼럼에 대한 중재신청은 YS 정부 때는 없던 일이다. 하지만 DJ 정부에서 7건이 발생하더니 노무현 정부에선 2004년 7월까지만 해도 34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국정홍보처가 중재신청 등의 주무부처가 된 것도 DJ 정부 때였다. 홍보처는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공방이 한창이던 때부터 공격적으로 중재신청 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2001년 국정감사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7건에 불과했던 국정홍보처의 중재신청이 2001년에는 32건으로 늘었다”며 “이는 눈엣가시 같은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부가 언론의 비판과 반대의견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재신청 및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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