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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8월 22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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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의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에 특명이 떨어졌다.
1968년 1·21사태 직후 만들어진 특수부대는 창설연월을 따 ‘684부대’로 불렸다. 대북(對北) 응징 차원에서 부대의 ‘인간병기’는 김신조 일당과 똑같은 31명이었다.
684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작품이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흔쾌히 재가했다. “임자, 되로 받았으면 말로 갚아야지. 한번 만들어봐!”
그러나 1971년 8월 실미도를 탈출한 684부대 훈련병들이 총구를 겨눈 곳은 주석궁이 아니라 청와대였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군경과 대치 중 수류탄이 터져 폭사했다.
실미도는 30년 넘게 ‘익명의 섬’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실미도 사건’은 군대의 공식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관계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실화(實話)다.
684부대 김방일 소대장의 증언. “만들어놓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3년 넘게 지옥훈련을 받았으니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실전명령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1968년 8월 북한 침투명령이 떨어졌다 바로 취소된다.
그 이듬해 5월 “평양결사대 투입이 완료됐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시큰둥했다. 한반도에 데탕트의 훈풍이 불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평양당국과 비밀교섭이 오가고 있었다. 더 이상 684부대의 존재가치는 없었다. 골치 아픈 ‘살인병기’였다.
공군 검찰부장으로 실미도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김중권 전 민주당 대표. 실미도 사건은 엄연히 ‘훈련병들의 난동’이었다고 강조한다. “영화 ‘실미도’는 이들을 미화시켜 진실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이들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실미도 사건을 침묵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고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951년 육군첩보부대가 창설된 이래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모두 1만3000여명. 사망자 7800명, 부상자 200명. 나머지는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휴전협정 위반’이니.
‘군번도 계급도 없는’ 군인들은 전역 후에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보훈대상에서 제외됐다.
분단과 냉전의 그늘 속에서 그들은 지워졌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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