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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16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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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국무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된다. 당시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은 “여대(女大)와 백화점 화장실에서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녹취해 인터넷에 띄우는 사례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O양의 비디오’는 몰카가 아니었다.
문제는 테이프가 밖으로 새나간 것이다. 디지털시대에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세포분열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테이프를 구하기 위해 더 이상 ‘청계천’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었다. 인터넷은 욕망의 하수구였다.
맹랑한 것은 언론이었다.
한편에서는 도저히 궁금해서 ‘O양의 비디오’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야살을 떨었고 또 한편에서는 준엄한 목소리로 ‘관객’을 꾸짖었다.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며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고 몰아쳤다.
비디오에 무엇을 담든 그것은 전적으로 O양의 사생활이다. 그 때문에 그녀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더욱이 그 누구도 남의 사생활을 들추거나 돈벌이로 삼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문제는 창문이 열린 것이다. 방안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짐짓 근엄해져서는 우리 사회의 타락한 성윤리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들먹였다. O양에게 “당당하라”고 충고했다.
대체 뭘 당당하라는 것일까. 창문이 열린 것에 대해?
‘훔쳐보기’란 말이 그렇듯이 ‘관음(觀淫)’은 이미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해수욕장에서 수영복 차림의 여성을 바라보는 것도 ‘마음먹기 따라서는’ 얼마든지 관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음이 간음(姦淫)은 아니다.
매춘이 그러하듯이 포르노그래피도 인류의 시작과 함께 출현했다. 관음은 ‘오래된’ 욕구다. 본능이다.
‘보여진 것은 본 사람에 의해서 소유된다’(사르트르)고 했던가.
처방은 하나다. 중독되거나 식상(食傷)하거나!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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