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동서남북/러 연출자의 따끔한 충고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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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9시경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식당.

성곡오페라단(단장 백기현)의 한-러 합작 오레라 ‘이순신’ 공연을 위해 이 호텔에 묵고있는 한국의 주연급 성악가가 백 단장에게 다가와 “일부 연출 내용을 바꾸기로 성악가 그룹에서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백 단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단장인 자신은 물론 연출자(알렉산더 표도로프)와도 전혀 상의하지 않은 ‘일방 통보’였기 때문.

그는 부랴부랴 표도로프를 찾아가 공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성악 그룹의 의견을 받아달라고 사정했다. 연출자 지시를 십계명처럼 존중하는 외국 오페라계에서는 공연을 10시간 앞두고 출연진이 내용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표도로프는 잠시 난감해 했지만 결국 수용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지시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한때 연습조차 거부한 일부 한국 성악가들의 ‘위세’를 지난 수일간 경험한 터였다.

포도로프는 성악가들이 일부 연출 내용은 물론 대본까지 바꿔 자막과 실제 가사가 달라지는 당황스런 상황도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연이 모두 끝나자 백 단장에게 “앞으로 한국 성악가들과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뜸했다.

이번 공연은 공연장 예약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 백 단장은 당초 6월 오페라 전용 극장을 예약할 계획이었으나 정부가 예산을 제때 지원하지 않아 사채를 빌려 연극 전용 극장을 얻어야 했다.

문화관광부는 외국의 공연장 예약 관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예산을 오페라단이 공연을 위해 러시아로 출발하기 하루 전인 6일에야 지급했다. 충남도는 한국 오페라의 세계 진출 노력에 공감한다면서도 매년 뒤늦게 추경에 지원 예산을 편성하는가 하면 모두 국가에 부담을 떠넘기려고 하고 있다. 성곡오페라단은 2000년 오페라 이순신의 첫 해외 공연 때는 “웃돈을 줄테니 성곡오페라단과 맺은 계약을 해지하고 우리와 다시 계약을 맺자”며 공연장(이탈리아 로마의 시립오페라극장) 예약을 무산시키려던 일부 국내 오페라 극단주들의 방해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국내 예술계에서는 한국 오페라의 세계화는 외국의 높은 수준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보면 글로벌 룰을 지키지 않는 일부 음악가들과 관련 부처의 관료주의, 동종업계의 질시 등 내부의 적이 세계화를 가로막는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대전=지명훈기자 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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