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2030]<2>해외로…해외로…“한국서 살기 싫다”

  • 입력 2003년 9월 15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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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처음 받은 연봉이 5000만원이었습니다. 비싼 돈 들여 4년간 유학한 대가로는 많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회사 동료들은 ‘입사하자마자 5년차 월급을 받는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더군요. 더 이상 ‘이상한 한국사회’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서울의 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1999년 귀국해 서울 여의도의 신용평가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박모씨(34). 그는 요즘 주말마다 이민알선업체를 찾아다닌다.

“아내가 임신 3개월입니다.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 하나에 매달 100만원씩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이 직장에서 50세 넘겨 일할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연재물 목록▼

- <1>그들의 현주소…취업힘들고 빚 늘고

최근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열린 해외 이민 박람회에는 20, 30대 청년층이 대거 몰려 이민상담을 받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취업경쟁이나 열악한 자녀 교육환경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한국을 떠나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사회의 미래를 떠받쳐야 할 젊은이들이 한국을 탈출하고 있다. 표면적 이유는 취업경쟁에 떠밀리거나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다는 것.

하지만 한 꺼풀 안으로 들어가면 ‘한국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털어놓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나의 미래는 없다=지난해 초 서울 A대 공대를 졸업한 뒤 입사원서만 100통 이상 썼다는 양모씨(29). 이달 초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3박4일간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이민알선업체들은 6000만원 정도를 3년간 피지의 현지 은행에 예치하고 이와 별도로 체류비 2400만원을 갖고 있으면 피지 이민이 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다. 양씨는 “‘유산’을 미리 받아 비교적 이민이 쉬운 피지로 이민을 떠났다가 나중에 호주나 뉴질랜드로 다시 이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민을 준비하는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다음카페에서 캐나다 이민 동호회 사이트를 운영하는 송주엽씨(36)는 “20대 회원 비율이 30%를 넘어섰으며 대학생 회원도 상당수”라고 소개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희갑(崔熙甲) 수석연구원은 “청년층 이민 열풍은 원인이 한국에 대한 ‘환멸’에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떠났던 과거의 이민과는 크게 다르다”면서 “청년층 이탈로 고령화가 빨라지고 성장 잠재력도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 아이만큼은 한국인으로 키우지 않겠다=아내와 자녀를 해외로 보내고 남편은 남아 돈을 버는 ‘기러기 남편’, 자녀에게 선진국의 시민권을 만들어주기 위해 해외에서 아이를 낳는 ‘원정 출산’은 이미 뉴스도 아니다. 최근에는 한발 더 나아간 ‘위장 입양’도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성형외과를 개업하고 있는 정모 원장(36). 최근 이민알선업체를 통해 초등학교 2학년생 딸을 ‘입양’해 줄 교육 수준이 높은 재미교포 가정을 찾고 있다.

정 원장은 “밤 9시가 넘어야 학원에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만은 ‘미국인’으로 살게 해주기로 결심했다”면서 “알선업체 수수료로 몇천만원을 주고 ‘생활비와 교육비+α’를 입양가정에 정기적으로 지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서 이민업체를 운영하는 이모씨(35)는 “미국 시민권자는 고아가 아니라도 친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18세 미만의 어린이를 국내 또는 해외에서 입양할 수 있다”면서 “입양을 의뢰하는 이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을 둔 30대 고소득 학부모”라고 귀띔했다.

▽인재가 먼저 떠난다=능력 있는 젊은이들은 한국사회를 떠나려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에 비해 불만족스러운 사회적 보상을 꼽고 있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올해 초 미국 뉴욕 간호사 자격증을 딴 심모씨(27·여)는 “한국 사회에서 간호사가 받는 대우나 보수는 미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면서 “남자친구와 미국 이민을 떠나는 것을 전제로 결혼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전체 이민자의 수는 늘지 않았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선진국들이 경력 학력 어학 재산 등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이민에 ‘성공’하는 젊은층들은 한국 사회에서도 경쟁력 있는 인재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취업이민은 1998년 3805명에서 1999년 5267명, 2000년 8369명, 2001년 6079명, 2002년 6317명으로 다소 기복은 있지만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兪炳圭) 수석연구위원은 “지식기반 경제에 필요한 고도의 지식을 갖춘 인재가 떠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이민은 큰 문제”라며 “국내 ‘인력 공동화(空洞化)’는 물론 기술과 노하우의 해외 유출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인재가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고급인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특별취재팀

▼열악한 교육여건 개선이 급선무▼

20, 30대 해외 탈출 붐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인 열악한 교육 여건에 대해 정부가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해외 유학이나 자녀 교육을 위한 이민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혀온 외국인 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추진하는 등 나름대로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당초 관계 부처 협의를 거쳐 합의했던 내용까지 재검토 결정이 내려지는 등 주요 정책의 추진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결정된 사항인데도…=정부는 지난해 11월 자녀 해외교육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 재정경제부와 교육인적자원부 등 관계 부처 협의를 거쳐 내국인의 외국인학교 입학 자격인 해외 거주 기간을 5년 이상에서 3년 이상으로 완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올 1월 이 결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고 시행을 늦춰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외국인학교에 대한 내국인 입학자격 완화는 사실상 초, 중등 교육을 개방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교육관련 단체와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당초 내국인의 외국인학교 입학자격 완화를 위한 ‘외국인학교 설립 및 운영 규정’ 제정은 교육관련 단체들의 동의가 없는 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제자유구역에 외국 교육기관을 유치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키로 한 방침도 교육부 반대로 답보 상태에 있다.

재경부는 올 7월부터 시행 중인 경제자유구역 법에 맞춰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 교육기관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키로 했다.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파견될 외국기업 임직원의 자녀들을 위한 외국교육기관 설립이 필수적이란 판단에 따른 것. 하지만 교육부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견 수렴 절차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다.

▽외국인 학교의 경제적 효과=대다수 전문가들은 해외로 유출되는 유학 비용을 흡수하는 것은 물론 외자(外資) 유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우천식(禹天植) 한국개발연구원(KDI) 지식경제팀장은 “한국인이 유학이나 연수에 쓴 비용은 연간 45억달러(2002년 기준)로 무역외 수지 적자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외국인 학교가 많이 생기면 이들 유학 수요를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창용(文昌用) 재경부 기술정보과장은 “외국인 학교 설립은 젊은층의 해외 탈출 러시를 막는 효과 외에 외국인 투자 유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며 “획일적인 하향 평준화식 교육으로는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해외 유학 및 연수 경비 현황
연도2001년2002년
유학 및 연수 경비 추정액(A)37.1억달러45.8억달러
무역수지 흑자액(B)93.4억달러108억달러
교육인적자원부 예산(C) 155.1억달러178.1억달러
무역수지 흑자액 대비 유학 및 연수 경비 추정액(A/B)39.7%42.2%
교육 예산 대비 유학 및 연수 경비 추정액(A/C)23.9%25.7%
자료:한국무역협회

▼이민열풍 이렇게 잡자▼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민은 비용과 수익을 계산한 ‘경제적 선택’이다.

비용 측면에서 보면 이민자들은 국내에서 사는 것이 해외에서 사는 것보다 더 비싸다고 판단하고 있다.

높아지는 청년 실업률에서 보듯 우선 한국 노동시장은 진입 비용이 매우 높다. 대학생들은 해외연수, 영어공부, 외모가꾸기 등에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한다.

취업이 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고 40대와 50대에 회사를 나가야 한다. 사회안전망도 부족해 회사를 나오면 막막하다. 또 사교육 열풍으로 자녀 양육비도 엄청나다.

수익 측면에서 이민자들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자녀들을 더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은 대부분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수인력들이다. 성공에 대한 예상 수익은 늘 높게 마련이다. 사회안전망도 탄탄해 사업 실패나 해고에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일부에선 이민자들의 절대적 숫자가 크지 않기 때문에 노동시장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큰 흐름이다. 몸은 아니지만 마음이 한국을 떠났다면 국내 노동현장의 활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정부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키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며 교육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금방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오히려 수익 측면에 신경을 써야 한다. 1970, 80년대에도 이런 비용들은 존재했다. 그래도 해외에 나갔던 한국의 우수 인력들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한국의 고도성장에서 얻는 수익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경제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많지 않다. 한국은 여전히 높은 성장가능성을 갖고 있다. 다만 불확실성이 너무 많을 뿐이다.

정부는 이 불확실성들을 없애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국내 기업들의 투자와 생산, 그리고 해외 직접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정부의 고민이 절실한 때다.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특별취재팀▼

▽팀장=권순활 경제부 차장

▽팀원=임규진 차장급기자

박중현 송진흡 고기정 최호원 박용 김광현

신석호 이정은 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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