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 앞둔 철학-사학 '기독교 지성' 손봉호·이만열 교수

  • 입력 2003년 6월 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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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호 교수 - 박주일기자
손봉호 교수 - 박주일기자
《올 1학기를 끝으로 퇴임하는 손봉호(孫鳳鎬·65) 서울대 사회교육학과 교수와 이만열(李萬烈·65) 숙명여대 사학과 교수는 각각 철학과 사학 분야의 대표적 기독교 지성이다. 서울대 재학시절 SFC라는 기독교단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기독교 내의 가장 보수적인 교단인 예수교장로회 고신측 교회에 다녔고 4·19혁명의 영향을 받은 학문세대로서 사회 속의 기독교윤리 실천에 앞장선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 교수는 5일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했고 손 교수는 한 대학의 석좌교수로 초빙돼 정년 이후가 오히려 더 바쁘게 됐다.》

▼서울대 손봉호 교수 ▼

손교수는 이마누엘 칸트와 에드문트 후설을 전공했으며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등 시민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한 단계 높인 실천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신학이 필요한 것이지 철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독교 철학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철학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시도해볼 만하다. 역설적으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철학을 더 잘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다. 블레즈 파스칼이 말했듯이 철학을 조롱하는 자가 진정 철학하는 자다. 내 박사학위 논문은 철학을 수학처럼 ‘엄밀한(rigorous)’ 학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 만들려고 했던 칸트나 후설을 비판한 것이다.”

―교수는 이론으로 먹고 사는 직업일텐데 이론보다는 실천에 주력해온 게 아닌가.

“학자로서의 삶에 충실하는 것과 시민운동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 지금도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다. 초기에는 현상학 분야에서 좋은 논문도 꽤 썼지만 학술적인 글은 동료도 학생도 읽지 않는 지적 풍토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후 가능한 한 쉽게 글을 쓰게 됐고 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너무 이론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이론은 현실의 풍부함을 깎아내고 뼈만 추려낸 것인데 그것이 뼈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손 교수는 대학시절 4·19혁명에 앞장섰고 4·19혁명 직후 새생활운동을 이끌 정도로 실천지향적이었다. 댄스홀을 습격해 대낮에 춤을 추던 남녀를 앉혀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밀수된 커피를 찾아내 불태우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한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승용차 대신 버스로 출퇴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에너지 절약에 대해선 나로 모르게 민감해진다. 평소 빈 강의실에 켜진 불을 끄고 다니는 게 일이다. 언젠가 한 신문에 내가 에어컨을 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썼더니 당장 한 젊은 교수가 ‘개인의 윤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구조를 소홀히 한다’고 반박해왔다. 그러나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는 개인 윤리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게 내 소신이다. 반대로 약자가 아주 도덕적이 되길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약자에 대해서는 구조적 요인을 감안해야 한다.”

―제자 중 교사가 많을 텐데 작년 반전교육, 반미교육에 나선 전교조 교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교사는 자신의 가치관을 가르칠 권리가 없다. 중고교 교사는 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어느 정도 걸러진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교육자는 그 관심이 학생에 있어야지 자신의 중요성, 자신의 권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미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지금처럼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 돼본 적이 없다. 미국은 9·11테러 이후 대범한 나라에서 자기를 보호하는 나라로 변하고 말았다. 가난하고 약한 나라는 국수적이 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큰 나라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퇴임 후 계획은….

“윤리학 책을 쓸 계획이다. 서양의 윤리학은 윤리학 자체의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윤리학은 이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이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윤리학은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윤리학은 단순하다. 직간접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윤리다. 이런 원칙에 근거한 구체적 윤리학을 구상하고 있다.”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 ▼

이만열 교수 - 김미옥기자

신학이 아닌 국사의 한 분야로서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는 이 교수에게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민족의식이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관심을 가져왔다.

―성리학이나 기독교 모두 외세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민족적 성리학이 성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민족적 기독교도 성립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기독교의 상황은 특수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은 서방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일본에 대해 한국 기독교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무실역행운동부터 의혈투쟁세력까지 각 방면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민족주의자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영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인도의 경우라면 그 곳 기독교는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부에서 전래된 종교는 잘못 이해될 수 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를 다녔다는 것과 그들이 기독교 정신을 이해했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일 수 있다.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민족주의자로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을 든다면….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을 꼽고 싶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고 외친 도산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기독교 정신의 깊이가 느껴진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도 1902년부터 교회를 다닌 기록이 있다.그렇다고 백범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성경문구를 인용하는 맥락은 놀라울 정도로 적확하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신채호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근대사 전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기독교계의 대표자들이 유신을 지지하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 궁금했다. 73년 한국사론에 발표한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 그 첫 결실인데 반향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80년 해직 후 기독교사 관련 자료를 본격적으로 모을 기회를 얻었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앞두고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고 백낙준(白樂濬) 이후 가장 많은 한국 교회사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독실하다 못해 ‘교조적’이기까지 한 신앙으로 유명하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때 월요일 시험을 앞두고도 일요일 자정이 지나서야 책을 들었고 대학 시절 한 학기 한 번뿐인 사적답사가 늘 일요일을 끼고 있어 한번도 답사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처음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을 때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할 생각을 했다. 4·19혁명 때는 군 복무 중이었다. 군에서도 라디오 등을 통해 민족주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같은 부대에 통역장교로 있던 중위 1명이 내게 우리 역사에 대해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해 창피를 당한 일이 있었다. 제대 후 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기독교계가 진보와 보수로 나뉜 것은 68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을 둘러싼 갈등에서였고 그 둘이 다시 만난 것은 90년대 초 북한돕기 운동에서였다. 닫힌 보수가 있는가 하면 닫힌 진보도 있다. 보수건 진보건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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