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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17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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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현장을 찾았을 때 담과 대문은 이미 철거됐고 안채 건물만 남아 있었다.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주변은 황량하고 스산했다. 이 건물을 관리하던 김모씨는 “이곳에 연립주택이 들어설 것 같다. 우리도 빨리 이사갈 집을 찾아야 하는데…”라면서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문화재 전문가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고택 보존을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최남선이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살면서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던 곳이고 건물도 낡아 보존할 가치가 없다”는 시문화재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친일이라는 얼룩에 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흰 정원’이란 뜻의 소원.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친일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는 문학평론가 고 김현의 말이 생각났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 주택가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 역시 비운의 흔적이다. 이 비석은 1639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승전을 자랑하기 위해 한강가의 나루터 삼전도에 세운 것이다. 원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고,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 비석 앞뒤 면에 만주글자 몽골글자 한자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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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는 최남선 고택 못지않게 사연이 절절하다. 1895년 고종은 “굴욕적인 비석을 보고 싶지 않다”면서 한강에 빠뜨렸다. 그러나 1913년 일제가 이 비석을 건져 올렸다. 조선의 치욕을 일부러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속셈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지역 주민들이 같은 이유로 이 비석을 땅 속에 묻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1963년 홍수 때 그 모습을 드러냈고 당시 문교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이 비석을 송파나루터 동남쪽인 석촌동에 세워 놓았다.
이후 서울시는 1983년 송파대로를 확장하면서 현재 위치인 석촌동 주택가로 옮겼다. 찾아가기도 어렵고 잘 보이지도 않는 비석 위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엄창섭(嚴昌燮) 송파구 문화재위원은 “원래 위치인 석촌호 주변(옛 송파나루터)으로 옮겨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치욕의 역사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 게다가 석촌호 주변이 삼전도비의 원래 위치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17일 삼전도비 앞에서 한 시민은 “와서 보니 기분이 씁쓸하군요. 굳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세워 놓을 필요까지 있는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에 빠뜨리고 땅에 묻어도 결국 살아남은 삼전도비. 감추고 싶지만 감춰질 수 없는 역사, 이것이 바로 최남선 고택과 삼전도비가 전해 주는 교훈이 아닐까.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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