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기업 도덕적 헤이 백태]'무늬만 벤처인' 많다

  • 입력 2000년 11월 28일 18시 48분


K씨(44)는 지난해 1월 대학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금융벤처회사를 창업했다. 아이디어와 의욕만 있으면 펀딩(자금모집)이 어렵지 않았던 시절 10억원의 자본금을 모아 문을 열었다.

교수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그가 주로 의지한 사람은 부사장으로 영입한 대학후배. 후배는 K씨의 창업얘기를 듣더니 “열심히 돕겠다”면서 대기업 과장자리를 팽개치고 나왔다. 동향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K씨 본인은 기술개발에만 주력하고 후배에게 회사의 모든 일을 맡겼다.

▼"갚으면 될것 아니냐"▼

그러나 올 6월, 믿었던 후배가 여비서와 함께 회사 돈 3억원을 횡령해 달아나면서 그의 회사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소규모 회사에서 현금 3억원은 회사의 운영자금 전액이나 다름없기 때문. 급기야 그는 회사 문도 닫고 매일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폐인생활을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인터넷 솔루션업체를 운영하는 김모사장(43)도 두 달 전 부하직원 L씨(34)의 비리사실을 적발한 뒤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연봉 7000만원과 고액의 이적료까지 지불하고 L씨를 스카우트했으나 입사 후 10개월 동안 무려 1억원에 달하는 회사 돈을 갖고 사채놀이를 한 것이 적발된 것. 김사장은 “범죄행위를 추궁하자 ‘갚으면 될 것 아니냐’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쳐 할 말을 잃었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에 고발은커녕 당장 해고하고 싶어도 L씨가 맡은 일이 핵심파트라서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하소연.

최근 ‘정현준게이트’에 이어 ‘진승현게이트’에서도 드러났지만 일부 벤처기업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벤처업계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사례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실히 일하고 있는 많은 벤처기업 종사자들에까지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지난해 말 설립된 한 벤처회사는 창업 1년 만에 경영이 어려워진 코스닥 상장업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회사 임원진들은 기업을 인수합병한지 5개월 만에 주식을 모두 내다 팔아 100억원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얻은 뒤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기술개발이나 경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호화판 인테리어, 임원용 외제차 구입, 천문학적인 외부 접대비용 등에 돈을 쓰더니 최근에는 아예 초창기 아이템을 접고 경험이 전혀 없는 다른 사업으로 업종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것.

▼'진짜 벤처'만 피해▼

이 회사에서 퇴직한 한 직원은 “창업 핵심멤버들은 이미 다 떠났다”며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업종을 바꿀 테니 따라 오려면 오고 싫으면 나가라고 종용하는 임원진에게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쇠귀에 경읽기”라고 분노했다.

비즈하이 컨설팅의 한상복(韓相福·38) 기업컨설팅 팀장은 “대부분의 벤처들은 열심히 기술개발에 주력, 나름대로 수익모델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며 “그러나 기업마인드 없이 벤처를 그저 ‘대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부도덕한 기업활동이 업계전반의 풍토를 더럽히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허문명·최호원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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