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정부案]醫協 "거부" 병원協 "긍정적"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29분


《정부가 23일 고위 당정회의를 거쳐 내놓은 의료대란 수습방안은 의료계 요구를 100%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종전보다는 구체적이고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의약분업의 경우 ‘선(先)시행, 후(後)보완’이라는 원칙을 지키되 의료계가 그동안 주장해 온 진료권 보장, 의료보험 수가 현실화, 의료계 발전방안에 대한 ‘의지’를 보여줘 의료계를 끌어안으려는 흔적이 보인다. 개원의 위주인 대한의사협회는 이런 정부안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집단폐업을 계속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대학병원과 중소병원이 회원으로 있는 대한병원협회는 긍정적인 입장이어서 대조적이다.》

▼정부의 수습안/약사법 연내 개정 임의조제 근절▼

▽의약분업〓핵심 쟁점은 약사의 임의조제를 가능하게 한다고 의료계가 지적해 온 약사법 개정 여부로 정부는 지금까지 의약분업을 3개월 정도 시행한 뒤 ‘문제점이 드러나면’ 보완할 수 있다고 얘기해왔다.

이번 고위 당정회의도 의약분업을 다음달 1일부터 시행한다는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문제점 보완을 위해 연말까지 약사법 개정 약속을 분명히 한 점이 다르다.

의료계가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이라며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약사법 39조2항은 약사의 의약품 판매방식을 규정한 내용이므로 의약분업의 한 당사자인 약계와의 협의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22일 대한약사회 관계자들을 만나 약사법 개정에 동의하도록 요청했고 약사회는 이날밤 “법 정신에 어긋나는 임의조제를 하지 않고 의약분업 시행 뒤 부정적 문제점이 발생되면 약사법 개정 등 개선방안 마련에 동의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체조제 금지에 대해서는 병의원과 약계 대표가 참여하는 ‘지역협력위원회’를 통해 의료기관이 통보한 처방 의약품은 ‘쌍방 상호 협의하여’ 대체 조제를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의료계와 약계의 체면을 모두 살려줬다.

대체조제시 약사가 환자의 동의를 거쳐 나중에 의사에게 통보토록 하는 규정은 그대로 두되 양측 협의아래 대체조제 범위를 미리 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의사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운영의 묘를 찾은 것.

▽의료계 발전〓저수가 저급여로 인한 의료기관의 경영상 문제점과 적자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지원을 포함한 구체적 방안을 9월말까지 마련하고 동네 의원과 약국 활성화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정부는 그동안 의약분업 시행으로 의료계와 약계가 손실을 보지 않도록 3개월간의 운영결과를 검토해서 의보수가를 재조정하고 이와 별도로 의보수가체계를 전면 재조정하겠다는 원론적 답변으로 일관해왔다.

고위 당정회의도 이런 정부방침을 재확인한 셈이지만 ‘9월말까지’로 시한을 명시해서 눈길을 끈다. 당장의 의료대란을 수습하기 위한 ‘립 서비스’가 아니라 분명한 의지가 담겼음을 보여준 것.

당정 관계자들이 전공의 처우개선을 여러 차례 강조한 건 의료대란이 이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대학병원과 중소병원까지 더욱 확산되면서 4월 4∼6일의 동네의원 위주의 집단휴진보다 파급효과가 훨씬 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의보수가 조정 등 의료계 발전방안을 추진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는 점. 결국 의료보험료를 인상하거나 국고지원, 즉 세금을 늘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어떤 방식이든 국민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특히 사상 유례 없는 의료대란으로 불편을 겪은 국민이 의료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상황에서 의료계 발전을 위해 막대한 재정지원을 한다는 점이 설득력을 얻고 사회적 합의를 거치려면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차흥봉(車興奉)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서비스 수준을 높이려면 의보수가 인상이 불가피하므로 국민부담이 늘어나지만 결국은 국민건강에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의료계/"투쟁 계속 칼은 뺐지만…"▼

집단폐업을 주도하고 있는 의료계 집행부는 23일 정부 여당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긴 했으나 향후 투쟁 진로를 놓고 갈피를 못잡고 있는 분위기이다. 정확히 말하면 일반 회원들의 강경 움직임에 책임 있는 전략과 투쟁 수위를 내놓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안을 최종 거부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김재정(金在正)의사협회회장과 신상진(申相珍)의권쟁취투쟁위원장은 이날 새벽 김유배(金有培)대통령복지노동수석과 시내 한 호텔에서 긴급 회동,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정부안이 나오면서 집행부 일부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정부 태도가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감정에 복받친 회원들이 반발하자 집행부 차원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고 결국 ‘수용거부’라는 강경 방침으로 선회했다.

의쟁투 중앙위원 회의에서도 “일단 회원 투표에 부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으나 대표자대회에서는 투표할 가치조차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누구도 ‘전략적 후퇴’도 필요하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만장일치로 수용 거부를 결의했다. 요컨대 집행부가 통일된 입장을 정리해 회원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지도력 부재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정부안 수용 거부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집행부 일각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노선을 정해야 할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초 폐업 투쟁은 최대 이번 주말까지로 잡혀 있었다. 내주까지 일사불란하게 폐업이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의료계는 주말에 정부의 손짓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정부가 23일 내놓은 최종안의 구체적인 내용, 예를 들면 의보수가 재정을 얼마나 확충하고 처방료를 얼마 인상할 것인지, 약사법은 언제 어떻게 개정할 것이라든지에 대한 추가적인 ‘이면 합의’를 바라고 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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