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기업주 '채무회피 創業' 제동…"새회사서 돈 갚아라"

  • 입력 2000년 5월 30일 23시 48분


사장이 회사(법인) 명의로 진 빚을 갚지 않기 위해 현 회사를 자본잠식 상태로 만들고 이름만 다른 회사를 설립했다면 새 회사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회사법상 학설로만 존재했던 ‘법인격(法人格) 남용이론’을 적용해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한 첫 판결로 악덕 기업주들의 채무 회피 수단에 제동을 건 것이다.

서울지법 민사합의13부(재판장 유원규·柳元奎부장판사)는 최근 군화(軍靴)제조업자인 김모씨가 무역회사인 B사를 상대로 낸 물품대금 청구소송에서 이같이 판시, “B사는 김씨에게 물건 값 7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으로 30일 밝혀졌다.

재판부는 “B사 사장 유모씨는 김씨에게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사장이던 A사와 영업내용과 주주, 경영진 등이 유사한 B사를 차린 점이 인정된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이어 “이는 채무면탈을 목적으로 한 주식회사 제도의 남용이며 신의에 위배되는 행위로 유씨는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격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며 “이 경우 채권자는 두 회사 어느 쪽에 대해서도 채무이행을 주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재판부가 인용한

‘법인격 남용이론’이란 채무면탈 등 불법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은 그 목적에 관련해서는 법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인된다는 이론. 이 경우 법원은 법인 뒤에 숨겨진 실체를 살펴 권리관계를 판단해야 한다.

김씨는 96년 유씨가 운영하던 A사에 러시아로 수출하는 군화 6660켤레를 납품했으나 A사가 대금을 지급하지 않자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를 받아 A사 명의의 세금을 압류해 1500여 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김씨는 사장 유씨가 중재가 진행되던 97년 B사를 차리고 A사는 사실상 ‘껍데기’ 회사로 남겨놓아 나머지 대금 7000여만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소송을 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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