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범 정필호 12일만에 검거]생라면 씹으며 '게릴라 은신'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탈주범 정필호(鄭弼鎬·37)씨는 낮에는 산 속에서 숨어 지내고 밤에는 산기슭으로 내려와 동굴 속에서 잠을 자는 등 빨치산 식 수법으로 12일간 은신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5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공범이 경찰에 붙잡히는 혼란한 틈을 타 화장실에서 빠져나간 정씨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은평구 일대의 야산으로 향했다.

야산 입구에 도착한 정씨는 인근 가게에서 라면 15봉지와 빵을 구입한 뒤 곧바로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혹시나 눈치채지 않을까.’ 시민 제보로 탈주 하루만에 검거된 공범들의 ‘쓰라린 실패’가 떠오르며 돈을 내미는 정씨의 손이 떨렸지만 주인은 굵은 뿔테 안경에 모자를 눌러쓴 그를 정말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밤엔 동굴서 새우잠▼

그 뒤 정씨는 경찰의 포위망을 따돌리기 위해 등산로가 아닌 갓길을 주로 이용했고 때로는 미리 준비한 로프로 바위를 타넘고 이동하기도 했다.

낮에는 주로 산 정상 부근의 바위틈에 몸을 숨겼던 정씨는 밤이 되면 추위를 피해 중턱 아래로 내려와 동굴 속에서 낙엽과 주운 쌀포대를 덮고 새우잠을 자는 ‘빨치산식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잠을 자다가도 ‘바스락’ 소리에 놀라 동굴을 빠져나와 다시 정상으로 오르기를 수차례.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했다.

불도 피울 수 없었다. 정씨는 배가 고프면 생라면을 뜯어먹었고 목이 마르면 계곡에 흐르는 물을 퍼마셨다. 그러나 은신생활이 장기화되면서 2벌의 잠바와 면바지만으로는 뼛속까지 얼어붙는 겨울산의 추위를 견뎌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식량은 다 떨어져가고 추위는 모질었다. 정씨에겐 도피자금 40만원 중 11만원이 수중에 남아 있었지만 식량을 구하러 민가로 내려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얼굴이 담긴 수만장의 전단이 도처에 뿌려졌을테고 경찰 포위망이 ‘턱밑’까지 와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

기력이 쇠해질 대로 쇠한 정씨는 결국 애인 전모씨에게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7일 오전 주택가로 조심스레 발길을 옮겼다.

▼애인에 도움청하다 덜미▼

“불광사 인근의 해장국집으로 당장 나와줘.” 이날 오전 6시16분 넘어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공중전화 부스를 옮겨가며 두차례 전씨에게 전화를 건 뒤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던 정씨는 인근에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사복차림의 경찰을 발견했다.

‘틀렸어. 경찰이 냄새를 맡았군.’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1시간반 동안 수차례의 차량탈취극을 벌인 정씨가 결국 총을 쏘며 뒤따라온 경찰에 붙잡히며 12일간의 탈주극은 막을 내렸다. 경찰에 잡힐 때 정씨의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겼다.

<윤상호박윤철기자>ysh100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