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렴치한 대기업 주가조작]계열社동원 노골적「작전」

  • 입력 1999년 4월 22일 07시 53분


재벌그룹의 간판 전문경영인이 주가조작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대주주가 허위사실을 광범위하게 유포한 다음 자사주를 처분해 1백억원대의 차익을 챙긴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현대의 사례는 감독당국이 강력한 처벌의지를 보임으로써 주가관리란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주식시장에 개입해 온 재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주가관리’와 ‘시세조종’의 기준을 놓고 논란도 예상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그동안 수많은 불법 주식거래를 적발했지만 재벌계열사가 조직적으로 다른 계열사 주가조작에 나선 것을 포착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현대는 주식시장의 ‘떴다방’〓금감원 조사결과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의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루에 최대 1백49차례나 ‘사자’주문을 냈다. 어떤 날은 현대전자 하루 거래량의 93.2%를 매집하는 등 ‘통 큰’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미리 사고자 하는 목표수량을 정해놓고 조금씩 나눠 매도호가(呼價)보다 높은 값에 매수주문을 내는 것은 주가조작의 고전적 수법. 그렇지만 현대의 경우처럼 노골적인 ‘작전’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다른 대그룹과 달리 현대는 주식시장에서도 특유의 ‘밀어붙이기’를 불사, 이번에 크게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작년부터 “현대는 주식시장의 ‘떴다방’”이라는 말이 돌았다고 덧붙였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 주가조작을 위해 5개월 보름만에 총 1천9백52회, 현대상선은 열흘간 2백7회의 시세조종 주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의 주문을 받은 현대증권 법인영업팀은 다른 일은 거의 할 수 없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정몽헌(鄭夢憲)현대그룹회장을 비롯한 현대 오너집안의 경영자들이 대거 주식을 처분해 막대한 차익을 올렸고 이 돈으로 개인지분 확보를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됐으나 이번 고발대상에선 모두 빠졌다.

▽단기매매로 1백억원 차익〓경기화학공업 대주주 겸 대표이사 권회섭(權會燮)씨는 자사주를 단기간에 매매해 1백억원대의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겼다.

그는 97년1월 국내 최초로 사모(私募)전환사채(CB)를 발행, 화제를 모았던 인물. 당시 57억4천만원어치의 CB 인수자금도 계열사인 경기엔지니어링에서 변칙 조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주가 띄우기. 권씨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회계처리를 조작한 것은 물론 언론과 기업설명회 등을 통해 허위사실을 광범위하게 유포했다.

경기화학은 96, 97사업연도의 재무제표를 작성하면서 매출채권과 재고자산 금액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당기순이익을 조작했다. 이같은 엉터리 영업실적을 포함한 허위사실들은 언론보도와 사업설명회 등을 통해 증시와 투자자들에게 유포됐다.

97년 2∼8월 최소한 아홉차례의 보도와 기업설명회를 통해 유포된 주요 허위사실들은 △3천억원을 투자, 경기도에 20만평의 대규모 유통센터를 세운다 △소회사제를 실시해 경비가 20% 절감됐다 △97년 당기순이익이 40억원으로 전망되며 주당 장부가치가 3만1천7백원에 이른다 등.

그 결과 경기화학 주가는 97년 2월28일 7천1백원에서 8월8일 1만9천원까지 상승했다. 그러자 권씨는 CB 주식전환분을 포함한 보유주식 2백80만주를 팔아 1백억여원의 부당이익을 취했다. 금감원은 권씨에 대해 증권거래법상의 포괄적 사기금지 조항을 최초로 적용, 검찰에 고발했다.

▽기업은 망해도 오너는 산다〓거평그룹 부도직전 이 사실을 미리 안 오너가 갖고 있던 주식을 내다 판 것은 기업은 망해도 오너는 산다는 ‘통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예.

거평그룹 나승렬(羅承烈)회장은 주력사인 대한중석의 해외 영업양도가 무산돼 부도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작년 4월16일∼5월6일 대한중석 주식 19만2천주, ㈜거평 주식 8만2천주를 8개 차명계좌를 통해 매도했다. 그는 이로써 10억9천만원의 손실을 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한국주강 엔케이텔레콤 등의 사례에서도 관계회사의 임원이나 평소 자금거래로 부도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던 특수관계인들은 모두 빠져나가 애꿎은 일반 투자자들만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조사를 담당한 금감원 조사국 관계자들은 “오너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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