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5·18 비자금 항소심 판결문 요지<8>

  • 입력 1996년 12월 16일 19시 56분


▼내란죄의 종료시기에 대하여〓첫째, 이 사건에서는 비상계엄의 확대 이후에 일어난 여러 행위들도 국헌문란의 폭동으로 인정됨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런데 피고인들은 비상계엄의 확대 이외의 행위들은 모두 폭동이 아님을 전제로 입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이 점에서 논지는 이유 없다. 둘째, 국헌문란의 폭동은 개념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계속과 반복, 그리고 다수인에 의한 다수행위의 결합을 예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1회의 폭동의 발발과 동시에 혹은 그 직후에 성공이나 실패가 결정되는 국헌문란의 죄도 상상속에서는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 지방의 평온을 해칠 정도에 이르게 된 때에 국헌문란이 기수가 된다고 하는데 한 지방의 평온이라고 하는 것이 깨질 정도에 이르기 위하여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경과가 필요할 것임은 설명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동에 의한 국헌문란의 죄는 즉시범이 아니라 계속범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도 논지는 이유 없다. 셋째, 현재의 정부로 대표되는 기존의 권력집단과 그로부터 국가권력의 불법적 승계를 기도하는 내란집단과의 사이에 폭력을 동원하여 벌이는 투쟁이 바로 내란이라고 할 것인바 군주국가나 독재국가에서는 기존의 권력집단이 굴복하여 내란집단으로의 권력이동이 완료되는 순간 내란은 종료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그것이 헌법의 움직일 수 없는 기본원리로 되어 있으며 권력의 이동 내지 승계의 절차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존의 권력집단의 굴복만으로 내란은 종료하지 않는다. 내란에 의한 권력의 이동은 헌법에 명시된 권력승계의 절차를 실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고 주권자이며 헌법제정권력인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아니하여 내란집단에 저항하는 때에는 그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또는 반대로 내란집단이 국민의 저항에 굴복하기까지는 결코 내란은 종료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내란집단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무력 등의 폭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는 행위는 헌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결집한 헌법제정권력에 대한 강압에 해당하여 국헌문란의 폭동이 된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수차 언급한 바이다. 이 사건에서 보면 1980.5.18 이후에 일어난 광주시민의 일련의 대규모시위 같은 것이 바로 이러한 국민의 저항에 해당하고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국민의 저항과 이에 대한 피고인들의 폭동적인 진압은 제5공화국정권이 1987.6.29 이른바 6.29선언으로 국민들의 저항에 굴복하여 대통령직선제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간단없이 반복, 계속된 사실이 인정된다. 중요한 대규모의 저항과 진압만을 예로 들어도 1983.5.18경부터 같은 해 6.9까지 있었던 김영삼 전신민당총재의 단식사건과 그에 관련한 시위사태, 1984년 전반기의 해직교수의 복직 등 자율화이후의 전국대학생들의 민주화요구 시위, 1984년 후반기의 민정당 당사 및 민한당 당사 점거농성사건과 관련된 민주화요구 시위, 1986.2.28대학교수들의 민주화요구 시국선언과 서명운동, 1986.2.경부터 시작된 야권의 개헌서명운동, 1986.3. 서울대연합시위사건, 1986.5.의 전국중등교육자협의회의 교육민주화선언과 이를 지지하는 각종단체들의 민주화선언, 1987.1.경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에 관련한 추모시위사건, 1987.6경 있었던 학생들의 분신자살 등 민주화시위 및 이한열군 사망을 전후한 이른바 6월항쟁같은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1980.5.17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시작된 이 사건의 국헌문란의 폭동은 1987.6.29의 소위 6.29선언시에 비로소 종료되었다고 할 것이고 그 기간중의 모든 폭동적인 시위진압은, 이 사건의 범죄사실란에서 폭동으로 인정한 것들을 포함하여, 포괄하여 하나의 내란죄를 구성한다고 할 것이다. 피고인들의 범의가 단일하고 피해법익이 동일하며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견해를 달리하는 피고인들의 주장은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한편 원심이 폭동행위의 종료시기로 판시한 1981.1.24의 비상계엄 해제시점은 위에서 판시한 1987.6.29 이전이므로 이 점은 이 사건의 결론에 영향을 줄 사항이 되지 못한다. ============5.17은 군사반란인가================ △1980.5.17. 이후의 일련의 병력동원이 군사반란이 되는지 여부에 대하여〓원심이 반란행위로 판시한 것들을 보면, ①1980.5.17. 비상계엄전국확대를 전후하여 무장한 계엄군을 동원하여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체포한 사실, ②5.17. 저녁 피고인 노태우가 피고인 전두환과 공모하여 원심판시와 같이 비상계엄전국확대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무회의장에 소총 등으로 무장한 수경사의 병력을 배치한 사실, ③5.17. 저녁 무렵부터 5.18. 새벽까지 원심판시와 같이 전국의 주요 보안목표에 무장한 계엄군을 배치한 사실, ④5.18. 07:20경 피고인 노태우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의 가택에 소총 등을 휴대한 수경사의 헌병들을 배치하여 포위, 봉쇄한 사실, ⑤5.18. 01:45경부터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계엄군으로 국회의사당에 배치되어 이를 점거하면서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5.20.경 일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저지한 사실, ⑥광주에서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5.18.경부터 무장한 계엄군을 투입·증파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였으며 광주재진입작전을 실시하여 도청 등을 점령한 사실 등 6가지 사실이 있으므로 이러한 행위들이 반란에 해당하는지 검토한다. 먼저 위 ②의 사실에 대하여는, 원심이 적법하게 조사·채택한 증거들을 종합하면, 평소 중앙청 내부에 병력을 배치한 사실이 없었고 위 국무회의가 개최될 당시에도 특별히 중앙청내부에까지 무장한 헌병 등을 배치할 경호·경비상 필요가 없었으며 대통령이나 대통령 경호실장 또는 국무총리로부터 그러한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었고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이 있었던 것도 아닌 사실이 인정된다. 원래 국무회의장에 병력을 배치한다는 것은 통상은 있을 수 없는 행위이므로 대통령이 지휘계통에 따라 특별히 그리고 사전에 이를 명령하지 아니한 이상 이것은 대통령의 군통수권에 도전하는 행위이고 이로써 군의 통수계통에서 이탈하여 국무위원들을 협박한 것이므로 반란에 해당한다. 또한 위 ⑤의 사실에 대하여는, 앞에서 나온 증거들을 종합하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계기로 같은 해 5.18. 01:45경부터 주요보안목표로 지정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에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계엄군으로 배치되어 이를 점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안목표에 대한 경비수준을 넘어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사당 출입자체를 통제하고, 5.20.경에는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는 일부 국회의원들에 대하여 계엄군들이 소총 등으로 밀어내는 방법으로 이를 저지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원래 비상계엄하에서도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통상의 의정활동을 하는 것은 금지할 수 없는 것이고 의사당 건물의 안팎에서 특히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우려가 있어 의원들의 신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통령도 의원의 국회출입을 금지하는 권한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사건에서 보면 당시에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고 볼 증거가 없고 더구나 대통령이 사전에 의원들의 출입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육군참모총장 등의 지휘계통을 따라 내린 바 있다고 볼 증거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는 계엄실시중에 통상적으로 행하는 주요기관에 대한 경비차원을 넘어서 국회나 국회의원들의 직무를 폭력으로 방해한 것이므로 역시 반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밖에 원심에서 반란행위로 판시한 위 ①(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 체포) ③(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배치) ④(김영삼 신민당총재 가택연금) ⑥(광주시위의 진압과 광주재진입작전 등)의 각 행위는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육군참모총장에 또는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장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이르는 군의 지휘통수계통을 따라 사전에 결재과정을 거쳐 작성된 명령에 의하여 혹은 사전 사후에 구두로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조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군의 최고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이 이러한 명령이나 조치에 대하여 사후에라도 이를 금지하거나 취소하거나 제한하는 별도의 지시를 한 바 있음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최규하 대통령의 군통수권 또는 국방부장관이나 육군참모총장 등의 지휘권에 반항하는 행위였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모두 반란으로 인정한 원심판시는 따르기 어렵고 이 부분에 대한 피고인들의 주장은 이유 있다. 나아가 유죄로 인정되는 반란행위 부분에 대하여 위 피고인들의 죄명을 표시함에 있어서, 피고인 노태우 황영시 이학봉 정호용은 앞에서 인정한 두 가지 반란행위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내용에 비추어 모의의 부분이 두드러지므로 당심에서는 이들을 모의 참여자로 표시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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