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확대 폭동성==============
▼1980년 5월 17일에 있었던 비상계엄확대선포의 법적 성격 및 폭동성에 대하여〓⑴내란죄의 폭동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일체의 강압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될 수 있는 협박은, 사람을 강압하여 외포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해악의 고지 전반을 의미하는 최광의의 것이고 이를 준비하거나 보조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비상계엄의 선포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게 되므로 계엄선포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기본권이 제약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상계엄의 선포에 이어 주요 보안목표와 요소에 계엄군이 배치되고 각종 포고령 등에 의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실제적 조치가 뒤따르며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가 계엄군의 관장하에 들어가 국가기관의 권한이 정지되거나 제한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국무위원과 국회의원 그리고 모든 국가기관의 구성원이 계엄군의 위력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외포되는 상황이 조성된다. 그러므로 비상계엄의 선포는 그 후속조치와 불가분적으로 이어져 총체적으로 헌법기관을 강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되므로 이것은 폭동으로서의 협박행위가 될 수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폭동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비상계엄의 이러한 폭동성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될 경우에는 더욱 증대된다. 민간인인 국방부장관은 계엄실시와 관련하여 계엄사령관에 대하여 원래 지휘감독권이 있는데 전국적인 비상계엄하에서는 이러한 지휘감독권이 배제되어 버리므로 군부를 대표하는 계엄사령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됨은 물론 국방부장관이 계엄업무로부터 배제되므로 말미암아 자연히 계엄업무와 일반국정을 조정 통할하는 국무총리의 권한 그리고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마저도 배제됨으로써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받는 강압의 효과, 그리고 그에 부수하여 다른 국가기관의 구성원이 받는 강압의 정도가 더욱 증대되기 때문이다.
⑵또한 비상계엄 및 그 전국확대조치의 강압적 효과가 법령과 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법령이나 제도가 갖는 위협적인 효과도 원래 협박에 동원하는 해악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므로,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지고 비상계엄에 따르는 강압효과의 발생을 의도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충분히 협박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적법절차에 의한 신체구속이 피구속자에 가하는 고통과 불편을 협박범이 해악으로 이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상계엄의 확대가 폭동이 될 수 없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광주진압 내란죄 여부===============
▼1980년 5월 18일 이후에 광주에서 있었던 일련의 시위진압행위가 내란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하여〓○피고인들(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이하,10항에서는 같음)은 항소이유의 하나로, 광주사건은 시위와 진압이 예상외로 악화되어 발생된 것이고 피고인들의 시국수습방안에 광주시민들이 저항할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미리 강경진압을 공모하여 계획한 일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살피건대,
이 사건에서 우선 12월12일 군사반란사건으로 군의 지휘권을 완전히 장악한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시국수습방안(비상계엄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설치)을 수립하여 그 실행을 모의한 사실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또한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과 당심 증인 권정달의 당심 법정에서의 진술, 검사 작성의 김리균에 대한 진술조서의 진술기재, 육군본부에서 작성한 소요 진압 준비태세 점검 결과,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에서 작성한 작전조치사항의 기재를 종합하면 피고인들은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을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를 그 진압에 투입할 것을 계획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에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는 일방, 광주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일어나자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즉시 제7공수여단 제33대대와 제35대대를 광주시내에 투입하고 계속하여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및 제20사단까지를 증파·투입하여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다가 피고인들의 정국장악에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제거대상으로 삼은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체포할 경우 호남지역의 지역정서상 커다란 반발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견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더하여 보면, 피고인들은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할 무렵에 이미 광주시민 등 국민들의 저항을 예상하고 계엄군의 위력을 행사하여 조기에 이를 분쇄하기로 공모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모를 부인하는 피고인들의 논지는 이유 없다.
○피고인들은 다시, 광주시민의 시위를 계엄군이 진압한 것은 계엄업무의 수행이므로 국헌문란의 폭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차례로 검토한다.
⑴초기단계
당원이 뒤에 인정하는 범죄사실 중 1980.5.18부터 5.21까지 사이에 전개된 시위상황을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①1980.5.18.01:10경 특전사 7공수여단 소속 장교 94명,사병 680명이 엠(M)16소총 등을 휴대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한 상황에서, 같은 날 10:00경에는 2백여명에 이른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위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와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고, 학생들이 같은 날 10:30경 다른 학생 6백여명과 함께 광주 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전두환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확산되었다.
②위 부대원들이 금남로 일대로 출동, 5.18. 16:00경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실시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③11공수여단 병력 장교 162명, 사병 1,038명은 같은 달 19일 00:50경 엠(M)16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어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위력시위를 하였다.
④5.19. 10:00경부터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 학생들에 가세하여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김안부(남·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
⑤5.20 오후에는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 시위를 전개하면서 트럭, 버스 등이 계엄군에게 돌진하자, 3,7,11공수여단 병력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같은 날 24:00경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⑥5.21. 12:00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 공격 등을 시도한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성명불상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같은 날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민환(남·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⑦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원래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은 주권자로서 또 헌법제정권력으로서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소임을 갖는 것이므로 이러한 국민이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넘어 집단이나 집단유사의 결집을 이루어 헌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일정한 시점에서 담당할 경우에는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헌법기관에 준하여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강압으로 분쇄한다면 그것은 헌법기관을 강압으로 분쇄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건에서 보면 피고인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주요정치인들을 구속하고 비상계엄을 부당하게 전국으로 확대한 행위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이고 위의 시위상황에 의하면 광주시민들은 위와 같은 피고인들의 국헌문란행위를 항의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시위에 나온 것이므로 이것은 주권자이며 헌법제정권력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겹집을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고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난폭하게 이를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문란의 폭동에 해당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