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개딸과의 결별선언’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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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더불어민주당 비명계 의원 A는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전히 ‘개딸’들의 테러 1순위로 꼽히는 그에게선 이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부결’(138표)보다 ‘가결’(139표)이 딱 한 표 더 나오고, 무효와 기권이 20표 나온 것에 대해 “일부러 짜라고 해도 저렇게 못 짠다. 저 묘한 숫자 속에 진정한 당의 총의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당 대표이니 한 번은 지켜주겠다’라는 신의와, ‘그렇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경고라는 거죠.

무엇보다 ‘패배의식’이란 그의 단어 선택에 공감이 갔습니다. 요즘 민주당 의원들을 만나보면 “우린 뭘 해도 안 된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다”라는 분위기가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깔린 ‘학습된 무기력’이죠. 꼭 야당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여전히 169석이나 가진 원내 1당인걸요.

그런데 이번 표결 결과가 오랜만에 민주당 의원들에게 “우리도 바뀔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줬다는 거죠. 그 내막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독(毒)이 된 180석
민주당 내 학습된 무기력은 2020년 총선 이후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합니다.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코로나 시국에도, 심지어 조국 사태 속에서도 180석의 압승을 거둡니다. (물론 코로나 재난지원금의 깜짝 효과와 비례 위성정당까지 띄운 ‘꼼수’ 덕도 컸습니다만….)

국회에서 180석은 개헌을 제외하고 모든 법안과 예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너무 크게 이겼다. 180석이 결국 독이 될 것이다. 147석 정도가 적당한데…”라던 한 중진 의원의 말이 그땐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명언이었습니다.

총선이 치러지던 2020년 4월 15일 오후 당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국회 의원회관에 설치된 종합상황판에 당선 스티커를 붙이며 손뼉을 치는 모습. 왼쪽부터 더불어시민당(당시 민주당이 띄운 비례 위성정당) 이종걸 선거대책위원장,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 이해찬 대표, 더불어시민당 우희종 공동상임선대위원장. 동아일보 DB
총선이 치러지던 2020년 4월 15일 오후 당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국회 의원회관에 설치된 종합상황판에 당선 스티커를 붙이며 손뼉을 치는 모습. 왼쪽부터 더불어시민당(당시 민주당이 띄운 비례 위성정당) 이종걸 선거대책위원장,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 이해찬 대표, 더불어시민당 우희종 공동상임선대위원장. 동아일보 DB
2020년 4월 20일 총선 승리 후 처음 열린 의원총회에서 밝게 웃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의 모습. 동아일보 DB
2020년 4월 20일 총선 승리 후 처음 열린 의원총회에서 밝게 웃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의 모습. 동아일보 DB

180석을 확보한 당 지도부는 곧장 ‘원 보이스’부터 강조했습니다. 총선 공천 과정에서 ‘조국 내전’을 거쳤던 탓에 제2의 ‘조금박해’(조응천 금태섭 박용진 김해영 등 소장파 의원 모임)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컸겠죠. 갑자기 커져 버린 당의 덩치가 버겁기도 했을 겁니다. 당시 한 지도부 의원이 “열린우리당 시절 ‘108번뇌’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초장부터 초선 의원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17대 국회(2004년) 당시 108명의 초선 의원들의 과도한 개인플레이로 당이 우왕좌왕하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강성 지지층도 가세했습니다. “기껏 180석이나 만들어줬더니 뭐 하고 있느냐”고 본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거죠. 민주당이 180명의 ‘원보이스’로 무장한 채 강성 지지층의 뜻에 따라 ‘입법 독주’에 돌입한 배경입니다. 민주당은 2020년 7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임차인에게 4년 계약기간을 보장하고, 갱신 시 임대료 인상률을 5% 내로 제한)을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합니다. 그해 12월엔 공수처법 개정안과 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등 논란의 법안들도 야당과 합의 없이 통과시켰습니다. 야당은 필리버스터로 맞섰지만 결국 ‘쪽수’에 밀려 아무 힘도 못 썼습니다.

강성 지지층의 입김이 세질수록 당내에서도 신중파나 협상파보다는 강경파 의원들이 득세했습니다. 2021년 5월 전당대회에서 초선 김용민 의원이 강성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17.73%로 1위에 올라 수석 최고위원이 됐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김 의원은 당선 직후 김어준 유튜브에 나가 “검찰 개혁을 빨리 끝내겠다”라고 약속했죠.

2021년 5월 전당대회에서 수석 최고위원으로 뽑힌 뒤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에 나가 활짝 웃고 있는 김용민 의원. 유튜브 화면 캡처
2021년 5월 전당대회에서 수석 최고위원으로 뽑힌 뒤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에 나가 활짝 웃고 있는 김용민 의원. 유튜브 화면 캡처


김 의원 등이 속한 강경파 초선 의원 모임 ‘처럼회’가 당 안팎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입니다. 김 의원 등의 ‘성공 사례’에 너도나도 앞다퉈 지지층 입맛에 맞춘 강성 발언들과 강경 법안의 발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한 보좌진은 “법안을 과하게 밀어붙이면 ‘거여의 폭주’라고 욕먹고, 여론 눈치를 보느라 좀 자제하면 지지층이 난리 치고, 민주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라고 했습니다.

3년 새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의원들은 어느새 각자가 헌법기관인 것을 망각한 채 ‘군사 작전’을 치르듯 당의 지시대로 움직였습니다. ‘선당후사’를 위한 쓴소리는 의원총회가 아닌 술자리에서나 터져 나왔습니다. 인터뷰 때도 익명을 원하는 의원들이 늘었고요.

2020년 여름의 취재 기록을 돌아보니 그 때 이미 ‘비주류’ 의원들 사이에선 무력감이 팽배했습니다.

“지금 우리 당이 다수결의 원칙을 얘기하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데, 입법부에선 합의가 가장 중요하다. 법을 만드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고, 그래서 관행이란 게 중요한 데 너무 지나치다.” (5선 의원)

“공수처는 사실 천천히 해도 된다. 이해찬 대표도 계속 민생 법안이 최우선이라 해놓고 청와대에서 쪼니까 공수처로 자꾸 그렇게 가는데, 공수처가 민생이랑 뭔 상관이냐.” (3선 의원)

“요즘은 모든 의사결정과정이 당에서 논의하는 게 아니라 지도부가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다. 이럴 거면 원내대표만 뽑지, 무엇 하러 돈만 많이 들게 300명씩 뽑나 모르겠다. 요즘은 미래통합당과 같은 무력감을 느낀다. ‘말 해봤자 안 될 텐데 뭐 하려 하나’ 싶다.” (5선 의원)

● 개딸과의 결별 선언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과 함께 등판한 ‘개딸’과 손잡으면서 민주당은 더욱 민심과 멀어져 갔습니다. 개딸들의 극성맞은 문자폭탄에 지친 의원들은 침묵하기 시작했고, 일부 몇몇 ‘용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예 입을 닫았습니다.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이 0.73%포인트 차로 석패하자 개딸들은 패배의 이유를 당내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경선 때 이낙연 전 대표를 도왔던 의원들의 사무실로는 수백 통의 ‘팩스 테러’가 이어졌습니다. 잉크가 빨리 닳도록 검은색 바탕의 A4 용지에 흰색으로 ‘죽어라’는 등의 메시지를 적었다죠.

친문(친문재인) 좌장 홍영표 의원은 지방선거 패배 후 ‘이재명 책임론’을 말했다가 지역 사무실이 “치매 아니냐” 등 막말 문구가 적힌 3m짜리 대형 대자보로 도배되는 일도 겪었습니다.

2022년 6월 홍영표 의원의 지역 사무실에 붙은 ‘치매 대자보’. 논란이 되자 해당 대자보를 붙인 개딸들은 사무실을 찾아 꽃다발을 전달하고 사과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DB
2022년 6월 홍영표 의원의 지역 사무실에 붙은 ‘치매 대자보’. 논란이 되자 해당 대자보를 붙인 개딸들은 사무실을 찾아 꽃다발을 전달하고 사과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DB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거치면서 개딸들의 폭력성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당내 불만도 점점 쌓여갔던 것 같습니다.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온 이탈표가 그 증거겠죠. 비명계 의원들은 “그걸 보고 ‘나도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한 동료들이 많았을 것이라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한 비명계 초선 의원은 “돌이켜 보면 지난 총선 이후 의원들은 늘 ‘컨트롤’의 대상이었다. 원내에선 당 지도부가 당론을 강요했고, 원외에선 개딸들의 성화에 알아서 늘 눈치를 봤던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길들여 지던 중 이번 체포동의안 표결로 오랜만에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겁니다.

비명계 의원들 사이에선 “이제 개딸들이 두렵지 않다”는 반응도 나옵니다. 복수의 비명 의원들은 “전화번호 한 3000개 정도 차단하면 테러 문자도 안 온다”라고 합니다. 극성 개딸 규모가 대략 3000명 안팎일 거라는 겁니다.

‘김건희 특검법’ 반대 입장을 냈다가 개딸들의 테러를 받았던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왼쪽)은 지난해 9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공개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날 면담 자리에는 조 의원을 지지하거나 보수 성향으로 추정되는 남성 5명만 참석했다. 동아일보 DB
‘김건희 특검법’ 반대 입장을 냈다가 개딸들의 테러를 받았던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왼쪽)은 지난해 9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공개 면담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날 면담 자리에는 조 의원을 지지하거나 보수 성향으로 추정되는 남성 5명만 참석했다. 동아일보 DB


● 민주당의 갱생은 가능할까
이미 변화는 조금씩 감지되는 듯 합니다. 민주당은 지난 6일 각 시도당과 지역위원회에 ‘윤석열 정권 치욕적 강제동원 셀프배상/ 이완용의 부활인가!’ ‘국민능멸 굴욕외교!’ ‘친일본색 매국정권!’이라고 적힌 현수막 시안 3종을 전달했습니다. 통상 중앙당에서 문구 시안을 전달하면 현역 의원 등 지역위원장들이 그대로 만든 현수막을 지역구 골목골목에 내겁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6일 전국 시도당과 지역위원회에 내려보낸 강제징용배상 관련 현수막 시안.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6일 전국 시도당과 지역위원회에 내려보낸 강제징용배상 관련 현수막 시안.


그런데 이번엔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 “‘이완용’은 너무 나갔다”라는 자정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현수막 내용이 오히려 지역 여론에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였죠. 지도부 소속 한 의원조차 “나도 ‘이완용 현수막’은 못 걸었다”라고 하더군요. 개딸들이 지역구별 현수막 게시 현황을 체크해 ‘수박 색출’ 작업을 하고 있다지만 어느덧 의원들에겐 당장 내년 총선이 더 중요해진 겁니다.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이완용’ 문구를 담아 더불어민주당이 건 현수막. 뉴시스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이완용’ 문구를 담아 더불어민주당이 건 현수막. 뉴시스


A 의원은 이제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좀 다른 민주당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이 극성 태극기부대와 결별한 덕에 승리했듯이, 우리도 개딸과의 결별에 성공해야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민주당의 갱생이 가능할지,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저도 다시 한번 기대를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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