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2의 베트남’ 굴욕 |
‘제국의 무덤’ 아프간에서 20년만의 철수 실패한 아프간 전쟁 20년 미국이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7일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21년 8월 30일 철군을 마쳐 20년 만에 일단락됐다. 미군을 태운 마지막 C-17 수송기는 카불 시각 30일 밤 11시 59분에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을 떠났다. 미국은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OEF)‘이라는 이름으로 공습을 벌여 아프간에 들어갔으나 철수 당시 미국 국적자 200여명과 미군이나 중앙정보국(CIA), 미국 외교관들을 도왔던 아프간 통역사, 운전사 등과 그 가족 등 6만명을 탈레반의 보복 위험 속에 남겨둔 채 서둘러 떠났다. 미국은 아프간 20년간 2461명(13명은 마지막 철수 직전 카불 공항 테러 희생자)이 희생되고 전비 2조2600억달러(약 2620조원)를 썼지만 세계 최강국이 무장단체 탈레반에 손을 들고 나가는 형국이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4명의 대통령이 20년간 치른 전쟁은 아프간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시도할 기회를 주고 많은 여성에게 교육과 직업을 추구할 자유를 줬지만 거의 모든 목표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왕정기의 실리 외교 아프가니스탄은 18세기 두리니 왕조가 첫 근대국가를 이루기 전까지는 여러 민족과 부족이 할거했다. 아프간 영토는 고대 알렉산더 대왕부터 몽골 제국, 근대에는 대영 영국의 침략을 받았다. 아프간은 19세기에는 남진하는 러시아와 인도 식민지를 바탕으로 이를 막아내려는 영국간의 ’그레이트 게임‘의 무대였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지정학적 단층지대에서 영국과 는 3차례 전쟁을 치렀다. 아프간은 1차 세계 대전 후인 1919년 영국과 3차 전쟁에서 ’라왈핀디 조약‘을 통해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한 뒤 왕정 체제가 됐다. 독립 첫 국왕 아말눌라 칸(1919~29)과 2대 나디르 샤(1929~33 나디르 샤)를 거쳐 즉위한 국왕 무함마드 자히르 샤(1933~1973) 시절 아프간은 2차 대전에 불참하고 냉전시대에는 중립 정책을 펴면서 근대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이슬람 국가지만 서구 문물에도 개방적이었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를 펴면서도 인접국인 구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과 군사적으로 교류했다. 소련 연수를 다녀온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면서 이른바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1973년 샤 국왕의 사촌이자 매부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샤 국왕 해외 순방 중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하며 첫 대통령에 취임했다. 다우드 칸은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 정책을 폈다. 구소련, 아프간 수렁에 1978년 공산주의 정당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이 다우드 대통령 및 일가를 살해하고 정권을 전복했다. ’샤우르 혁명‘이다. 이에 전국적으로 이슬람 무자헤딘의 게릴라 저항이 발생해 내전으로 비화했다. 소련은 1979년 12월 사회주의 정부 지원 등을 명분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해 최대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다. 구소련의 지지를 받은 인민민주당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구소련 붕괴 당시인 1991년까지 존속했다. 파키스탄이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미국도 1979년 중반 이후 파키스탄 정보부(ISI)를 통해 반소련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2000개 이상의 FIM-92 스팅어 지대공 유도탄은 무자헤딘의 주력 무기가 됐다. 구소련은 1989년 구소련 붕괴의 내부적인 혼란과 사상자가 증가하는 아프간 전에 대한 여론 악화, 무자헤딘의 저항, 국제 사회의 압력 등으로 10년만에 철수했다. 영국에 이어 구소련이 물러나면서 아프간은 ’제국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왔다. 구소련이 붕괴 해체된 데는 체제의 낙후와 비효율성, 미국과의 군비 경쟁과 함께 아프간의 수렁에서 국력이 소진된 것도 한 요인이 됐다. 구소련이 철수한 뒤 무자헤딘 7개 단체와 북부 동맹 등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으나 아프간은 사실상 군소 군벌간 내전 상태로 들어갔다. 구소련에 대항하는 이슬람 무장세력 중에는 알 카에다도 있었다. 하지만 구소련이 물러간 뒤에는 미국이 배척하는 집단이 됐다. 반미로 돌아선 알 카에다는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을 적대적으로 여기다 9·11 테러까지 저질렀다. 탈레반 집권과 축출, 재집권 친소 정권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의 활동 속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이 1994년 결성된 뒤 2년 후 아프간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9·11 이후 미군에 축출될 때까지 7년 가량 집권하면서 ’샤리아‘에 바탕을 둔 원리주의 이슬람 정치로 아프간을 통치했다. 샤리아는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담은 코란과 하디스, 이슬람 공동체 내부 원칙을 담은 이즈마 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종교법이자 규범이다. 참수를 포함한 사형과 태형 등 전근대적 형벌이 포함되어 있어 반인권 비판을 받는다. 특히 여성은 교육과 사회 활동을 제한 금지하고 가족 외의 남성에게는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지 않도록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하도록 했다. 탈레반은 집권 1기 관공서 등 주요 일자리에서 여성을 내쫓고 12세 이상 여성의 교육 기회도 전면 박탈했다. 탈레반을 몰아낸 뒤 아프간은 미국의 지원하에 하미드 카르자이(2004~2014)와 아슈라프 가니(2014~2021) 대통령이 집권했으나 무능과 부패, 다양한 민족과 부족간 화합 실패 등으로 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다시 탈레반에 정권을 내주게 됐다. 미국도 아프간 수렁에 미국은 처음 아프간에 군사 개입할 때는 알 카에다 지도부 등을 제거하고 테러리스트의 거점을 파괴하는 목표를 세웠다. 차츰 아프간에 세속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세우는 것으로 목표를 확대하면서 수렁에 빠졌다. 아프간 내부적인 요인 못지않게 미국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프간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도 패퇴의 한 요인이 됐다. 아프간 주둔 미군을 2만 명에서 6000명으로 줄이자 탈레반은 지역을 거점으로 ’시간은 우리 편‘이라며 장기전을 펴며 세력을 불렸다. 2011년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고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간 철군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철군은커녕 다시 늘려야하는 상황이 됐다.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는 아프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8월 31일까지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4월 발표하면서 미군 철수 후에도 길게는 1년반 이상 탈레반과 정부군이 대치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미처 철수를 마치기도 전에 탈레반은 수도 카불까지 장악했다. 아프간에 들어와 20년을 머물렀지만 아프간에 대한 이해 부족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프간과 미-중 갈등 미국이 물러간 뒤 아프간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가장 관심은 중국과 탈레반 정권과의 관계다. 아프간은 6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중국과는 90km 가량 위구르자치구와 접해있다. 중국은 탈레반 집권이 신장자치구의 위구르 분리독립 세력을 자극하거나, 위구르족의 인권 탄압 호소에 탈레반이 호응하는 등 탯줄같이 이어진 와한 회랑을 통해 탈레반과 위구르족이 연계를 강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7월 28일 왕이 외교부장이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나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과의 단절을 촉구하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통한 아프간 재건 사업과 경제 지원을 제시했다. 채찍과 당근이다. 하지만 신장에서 위구르족에 대한 탄압에 공동으로 저항하겠다고 나설 경우 중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탈레반에서의 철수를 밝히면서 “우리의 전략적 경쟁자들은 미국이 아프간에서 2년, 4년, 심지어 20년 더 갈등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걸 가장 반길 것”이라고 했다. 아프간에서의 철수 목적 중에는 아프간의 수렁에서 빠져 나와 보다 전략적으로 위협이 되는 중국과 러시아에 집중하겠다는 뜻도 있다. 미국이 1980년대 무자헤딘에 제공한 대공 미사일 등이 구소련에 대항하는 주력 무기가 된 것처럼 미군이 철군하면서 남긴 블랙호크 헬기와 탱크 등 무기는 중국을 겨냥하는데 쓰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마치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이용한 중국 견제, 즉 미국판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반도는 대중 견제 전선의 최전방으로 미국이 앞으로 한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할 수도 있다.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미-중 갈등이라는 구도 속에 한반도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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