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철학교수, 주체철학과 결별한 뒤 찾은 인생[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4일 14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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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출장을 다녀온다고 집을 나선 남편은 몇 달째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람을 통해 알아보았더니 ‘프룬제 아카데미사건’에 연루돼 조사받는다고 했다.

“우리 남편은 정말 고지식하고 착한 사람인데, 죄가 없으니 조사받고 돌아올 거야.”

그러나 몇 달 뒤 남편이 반당반혁명범죄자로 판결됐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들도 정치범수용소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아내는 15세, 12세짜리 어린 아들들을 그러안았다. 더는 지체할 틈이 없었다. 연좌제가 적용되는 북한에서 정치범의 아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큰 아들이 말했다. “나는 죽어도 정치범수용소에 가지 않겠어요. 나 도망칠래요.” 순간 아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어린 둘째는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네가 정치범수용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살아도, 죽어도 형과 함께 해. 꽃제비로 방랑하며 살더라도 절대 붙잡히면 안돼.”

아이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얼마 뒤 보위부가 집에 들이닥쳤다. 어린 손주들에게 “아무래도 너희는 아버지를 따라 수용소에 갈 것 같으니 농사짓는 법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말하던 시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1998년 청진의학대학 철학교원 현인애 씨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 김일성대 철학부 입학
남편이 끌려가기 전까지 현 씨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는 195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참전자인 부친은 조선인민군 신문사 기자로 일했는데, 나중엔 장성급인 주필까지 했다.

‘토대’가 좋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공부까지 잘한 그는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했다. 수학, 물리 등 자연과학(이공계) 계통에 취미가 있어 물리학부에 가고 싶었지만 이공계는 학제가 1년 더 길었다. 이 때문에 여학생들은 대부분 빨리 졸업하려고 모두 사회과학 쪽으로 진학했다. 현 씨도 같은 이유로 철학부에 들어갔다. 철학부 선택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경제, 어문, 역사 등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는 철학부가 제일 끌렸다.

대학시절은 김정일의 후계자 등극시기와 일치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극하면서 온 나라를 들볶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주생활총화 제도가 나왔고, 문답식학습경연,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도 나왔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19일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 위한 당사상 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위 ‘2.19문헌’을 통해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최고 강령을 선포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는 북한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 전파에 앞장서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대학에서 그는 모범생이었다. 김정일의 노작을 달달 외웠고, 학부를 대표하여 문답식 학습경연에 참가해 우승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북한이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 결별하던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천사를 실제로 체험한 생생한 증인이었다.

“1970년대에만 해도 김일성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심화발전이라고 하면서 절반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절반은 주체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점점 김일성주의를 강조하더니 1983년에 가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이때는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김일성대 옆 부지에 금수산기념궁전을 지으면서 호위국이 김일성대 학생들 출신성분을 다 조사해 안 좋으면 퇴학시켜 지방에 내려 보냈어요. 우리 학급도 처음 입학할 때 30명이었는데, 1976년 판문점 도끼사건을 계기로 남조선 연고자 등을 포함해 8명이 퇴학당했습니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도끼만행 사건도 평양에 핵심지지 계층만 살게 하는 핑계거리로 이용한 것이다.

현 씨가 김일성대 철학부를 다녔지만, 당시 대학총장이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본 건 딱 한 번 먼발치에서 행사 때 보고서를 읽는 모습이 전부였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야 황 전 비서를 만났다. 황 전 비서는 그가 김일성대 철학부 출신이고, 북한에서 대학 철학교원으로 일했다는 것을 알고는 반색하며, 자신의 철학 강의를 청강하라고 권했다. 현 씨는 딱 2번만 강의를 듣고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이미 북한에서 죄 없는 남편을 빼앗아간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꼈고, 그 사상적 지주인 ‘주체사상’과 결별했기 때문이다.



# 대학 철학 교원
현 씨는 6년 학제를 마치고 1979년 12월에 졸업했다. 남들처럼 3대 혁명소조원으로 파견되는 대신 대학교원 양성반에 들어가 추가로 공부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쯤 아버지가 군복을 벗고 함경북도 청진에 내려갔다. 당시 북한은 장성급이 제대하면 ‘파벌이 생겨 종파주의가 만들어질 여지가 있다’며 평양에 남게 두거나 고향에 보내지 않고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 보냈다. 평안북도가 고향이었던 부친도 그런 이유로 청진으로 가야했다. 이 때문에 현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 함경북도 나진시에 있는 나진해운대학 철학교원으로 발령받아 내려갔다. 다른 동창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노동신문사, 조선중앙통신사 등으로 많이 갔다.

“당시 나진해운대학은 전부가 남학생들뿐이었어요. 대학 전체로 여교원도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내려온 셋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처녀 교원의 인기가 엄청 컸죠.”

현 씨는 이곳에서 10년을 일했다. 그때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이 생겼다.

1989년 청진으로 이동하는 남편을 따라 청진의학대학 철학교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체제에 대한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어요.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요. 간부였던 남편이 ‘당에서 말하는 인간 개조는 불가능해. 당신부터도 10년 넘게 개조되지 않잖아’ 이렇게 말하면 저도 ‘그래요. 당신도 개조 안 되는 거 보면 그런 것 같아요’라며 맞장구도 쳤죠. 한국에 와보니 부부가 화목하게 살려면 서로를 개조하려 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때가 생각났죠. 저는 여기 문화와 반대되는 사회에서 살았던 거죠.”

그러나 대학에선 다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대학에 제대군인 청년들이 많아서 여교원인 저에게 짓궂게 말할 때가 많았어요. 가령 ‘선생님, 새 물건이 나오면 먼저 가지려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고, 욕심이 생기는 법인데 어떻게 능력과 수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가 가능 합니까’라고 묻는 식이죠. 그때면 ‘공산주의 사회에 가면 사람들이 공산주의적 인간이 돼 서로 새 물건 먼저 가지려 싸우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말이죠.”

체제에 더욱 의문이 든 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동유럽이 붕괴되고 북한도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을 때였다. 이론이 잘못된 것인지 실천이 잘못된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 와중에도 권력자들은 잘 살고, 가난한 사람들부터 죽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평등사상에 의문부호가 붙기 시작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제자가 있어요. 저를 찾아와 ‘왜 우리 사회는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느냐’는 등 위험한 질문들을 쏟아냈어요.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혼자 생각하라’고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그가 나중에 청진경기장에 삐라를 붙여 체포됐고, 대학이 집중 검열을 받았어요. 구역병원 부원장 아들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는데, 그 일로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사라졌죠.”

# 남편의 숙청과 아들과의 이별
남편의 체포는 그에게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한 결정타가 됐다. 김정일은 최고사령관이 되자마자 구소련에서 유학을 했던 군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것을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이라고 부른다. 수십 명의 군 장성을 포함한 수백 명의 북한군 엘리트들이 간첩 혐의를 받고 처형됐다. 1993년 초부터 불기 시작한 숙청 바람은 1998년까지 이어졌다.

“남편은 소련에 딱 6개월 가 있었어요. 군 장교도 아니어서 숙청 마지막에 잡혀간 것 같습니다. 본인도 소련에서 유학했던 사람들이 잡혀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했지만, 설마 나까지 숙청할까 생각했어요.”

어느 날 평양에서 회의가 열린다고 남편에게 참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동료 수십 명과 함께 가는 회의어서 큰 의심 없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탈북을 막으면서 유인하는 수법이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소련 유학파 몇 명만 골라내 싣고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며 평양에 줄을 대 알아보았지만 행적은 묘연했다. 북한에선 남편을 정치범으로 잡아가면 아내는 이혼시킨다. 또 남편의 직계 남자 혈육은 모두 잡아간다. 졸지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이 비밀 처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이건 일제시대보다 더 하지 않는가.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빨치산 동료들의 부인이 면회도 가고 재판에도 참가했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잡혀간 남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잃었다. 일제는 김일성의 가족도 살게 놔두었는데, 우리는 연좌제로 죄 없는 가족도 잡아가니 이보다 더 악독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후 그는 대학에 더 출근하지 않았다.

보위부는 아들들이 집에 오나 1년 넘게 지켰다. 이웃들에게 임무를 줘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깊은 밤 아들들이 몰래 찾아왔다. 친척이나 아는 집에 일절 가지 못하고 방랑했던 터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루한 차림이었다. 그 어려운 와중에 형은 동생을 끝까지 데리고 다녔다. 두 아들을 본 그날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러나 반갑기보다 잡힐까봐 걱정부터 들었다.

큰 아들이 말했다.

“엄마, 돌아다니며 보니까 중국이란 곳에 가면 우리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중국에 가서 절대 돌아오지 말고 그곳에서 살아.”

아는 선을 통해 아들들이 무사히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현 씨는 처음으로 발편잠(근심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편안히 쉬는 잠을 뜻하는 북한말)을 잤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계속 북송돼 붙잡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 아들이 잡혀올지 몰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4년, 갑자기 낮선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들이 찾고 있으니 함께 국경에 가면 전화를 할 수 있다는 말에 급히 따라나섰다.

아들의 전화였다. 그런데 서울 말투였다. “얘들이 남조선에 갔구나”고 바로 직감했다.

21세가 된 아들은 몇 달 뒤에 엄마를 데리러 올 거니 중국에 넘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가서 아들들에게 뒤늦게나마 밥이라도 지어주고 싶었다. 남한에서 두 아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한때 방황도 했지만 바르게 성장해 있었다.



# 정착과정의 방황
2004년 7월 베트남에 머물던 탈북민 468명이 한국 정부가 보낸 여객기를 타고 한꺼번에 서울공항에 내렸다. 당시 떠들썩했던 사건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 중에 47세 현인애 씨도 있었다. 아들들은 “엄마가 운이 좋아서 1년 걸릴 과정을 한 달 만에 바로 한국에 왔다”고 좋아했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탈북민 조사기관에 가서 그가 했던 첫 질문은 “우리가 사회에 나가면 배치해줍니까”였다. 국가가 직장을 정해주는 북한식 사고방식에 한국도 직장을 알선해줄 것이란 기대를 품고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없고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대답에 많이 실망했다. “이 나이에 이제 어디 가서 정착을 하지.”

2004년 12월 하나원을 나와서 당시 대학생이던 큰 아들을 따라 우유배달을 도와주는 일로 정착의 첫 걸음을 뗐다. 북에선 대학선생이었지만, 한국에선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탈북민들이 걸려들었던 다단계 판매에도 뛰어들었어요.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몰랐어요. 석 달을 해보니 이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음식점에 취직하려 여기저기 다녔지만 얼굴에 선생님이라고 쓰여 있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1년 넘게 한국 사회 구석구석을 경험했다.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도 있었다.

김일성대 철학부를 나와 북에서 철학교원을 20년이나 했던 그의 경력을 안쓰러워했던 교수는 이대에서 석사과정부터 다녀볼 것을 권고했다. 학비도 교수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덕에 현 씨는 이대에서 2008년 석사를 마치고 2014년 2월 박사 학위까지 땄다. 2013년엔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객원연구위원 자격으로 1년 동안 미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에서 강사를 하다 2015년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북한과 한국에서의 경력이 도움이 됐다. 그는 통일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제 탈북민 사회의 연구를 말할 때 현인애 박사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 왜 탈북민은 보수가 되는가
현 씨는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의식 변화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북한이탈주민의 정치적 재사회화 연구’이다. 쉽게 말하면 ‘북한에서 주입받았던 혁명사상이 남쪽에 와서 어떻게 바뀌는지’가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가 보는 탈북민 사회는 어떨까. 왜 탈북민들은 보수, 나아가 극우화되는 경향이 높은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꽤 긴 설명을 늘어놨다.

“제가 정말 숱한 탈북민들을 만나보며 내린 결론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정보가 머리에 입력돼 분석돼 나오는 매커니즘이 남쪽에 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북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욱 바뀌지 않아요.

북에서 입력된 프로그램은 타협이 없는 ‘타도정신’입니다. 미제를 타도하고 혁명의 원수를 타도하고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죠. 한국에 오니 미제의 자리가 김정은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대화하고 타협할 줄을 잘 모르고, 타도할 대상, 투쟁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한국에 와보니 이곳의 고령층이 탈북자들과 사고방식이 비슷해요. 그러니 한국의 고령층과 탈북민들이 쉽게 같은 이데올로기로 동화되는 것이죠. 60세가 넘어 한국에 오면 하나도 바뀌지 않아요. 북한에서 간부를 했던 사람이 한국에 오면 권위주의 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몇 살 때 오면 한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그는

“대략 10살 전후에 오면 완전히 한국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살쯤에 오면 의식이 왔다갔다 합니다. 20살 지나서 오면 북한사람의 본성을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10살쯤에 한국에 와야 완전한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탈북 청년들을 만나왔던 기자에게 다소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다시 “제가 만났던 탈북 청년들은 아주 정착을 잘하고, 한국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는데, 10살은 너무 어리게 보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다시 긴 설명을 이어갔다. “젊은 탈북 친구들은 사고가 매우 유연한 것처럼 보이고, 한국의 문화와 의식구조를 잘 이해하고 정답은 확실히 잘 압니다. 그래서 설문조사 같은 것을 해보면 한국 기준에 아주 잘 맞게 정답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해하는 것과 감정 정서적으로 완전히 동화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여전히 사고방식과 감정 정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고 비타협적인 북한식을 벗기 어렵습니다.

가령 대학생 동아리를 예로 들면, 한국 친구들은 리더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본능적 거부감이 있습니다. ‘왜 내 의사를 묻지 않고 네가 혼자 결정하냐’며 아무리 현명한 결정도 독단이 들어가면 불쾌해하고 반발하죠. 한국 대학생들은 느리더라도 토론의 과정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탈북 대학생 동아리를 보면 그런 과정을 두고 ‘질질 끌어 짜증이 난다’고 생각납니다. 보통 똑똑한 리더를 내세우고 리더의 결정에 큰 거부감이 없이 따릅니다. 감정적으로 불쾌하다고 거부하지 않는 것이죠. 이런 판단은 보통 순간적으로 이뤄지는데 이런 것을 보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체질화된 감정정서는 다르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살아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과 똑같은 감정 정서적 코드로 맞춰 살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10대를 한국에서 보내면 죽을 때까지 어딘가에 한국인의 정체성이 남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던 것이다.

현 교수는 기자의 지적에 “더구나 한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크는데도 그 정도면,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 북한 청년이 잘 바뀌지 않는 것은 더구나 이상하지 않죠”라고 말했다.

# 누가 정착을 잘 하는가
그에게 “어떤 사람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시 그의 긴 답변이 쏟아졌다.

“북에서 반항적인 성격보다 체제 순응적 인물들이 정착을 잘하더군요. 한국도 권위주의, 집단주의적 의식이 강한 사회입니다. 어떤 곳이든 쉽게 순응하던 사람들이 정착도 순조롭게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유연한 사람이 정착을 잘합니다. 이젠 탈북민을 딱 만나보면 정착을 잘할 사람인지 아닌지 대충 감이 옵니다.

탈북민 정착에 대해 한국 사회에선 흔히 직업, 정착금과 같은 물질적 도움에 집중하는데,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여기 사람과 쉽게 어울리게 문화적으로 훈련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훈련이 안되면 취직을 해도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탈북자 본인들이 노력해 다가가야 하고, 한국 사람들도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탈북민을 품어줘야 합니다.

특히 제가 가슴 아픈 것은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렸을 때 한국에 오면 이곳에 동화될 수 있지만, 학교에서 탈북자라고 하면 왕따가 심합니다. 탈북 학생들이 자기가 북에서 왔다고 커밍아웃하는 비율은 50% 정도밖에 안되죠.”



현 박사는 또 도시에서 온 탈북민이 농촌에서 온 탈북민보다 정착이 더 쉽다고 말했다. 완전히 도시화된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선 그래도 북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봤던 사람, 아파트에서 살았던 사람이 낫다는 의미다.

‘탈북민을 오랫동안 연구해왔으면 본인은 한국 사회에 상당히 동화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현 박사는 손사래를 쳤다.

“나이 들어오면 잘 변하지 않아요. 저는 한국 사회를 보면서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필요에 따라선 강력한 권위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배가 침몰할 때 선장의 명령을 따라야지 저저마다 의견을 내놓고 수렴할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황 전 비서가 탈북했을 때 한국 언론들은 ‘주체사상의 망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비유하면 북한 대학에서 20년 동안 주체철학을 가르치던 현 박사는 ‘주체철학의 작은 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북한의 소위 ‘인간 중심의 주체철학’과는 결별했습니다. 인간은 귀중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며 긴 인터뷰를 맺었다.

그의 철학적 사고는 이제 남북 구성원의 의식구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멀고 먼 험한 바다를 헤치고 왔지만, 그의 돛배는 여전히 사색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북에서 온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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