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아오지서 제주로 탈북한 화가 “탱화를 그리는 이유…”[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1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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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화가가 2020년 12월 작업 중인 그림 앞에서 서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운 화가가 2020년 12월 작업 중인 그림 앞에서 서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982년 한반도 북단의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은덕은 악명 높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곳이다. 북한은 1977년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란 뜻으로 아오지의 원지명인 경흥을 은덕으로 바꾸었다가, 창피함을 알았는지 2005년에 경흥군으로 환원시켰다.

가난한 탄광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 살 때부터 연필만 쥐어주면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에 보내도, 인민학교에 보내도 공부보다는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남의 집에 가서 당시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온 날이면 공책 하나가 방금 본 만화 그림으로 금방 가득 채워졌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그는 미술소조에 다녔다. 그때면 종종 두만강 옆에 나가 수채화로 강변 풍경을 그렸다.

그는 1998년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하루 전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탈북했다. 중국에서도 그림을 그렸고 미술학원 선생까지 했다. 2016년 그는 마침내 한국에 왔다. 한반도 북쪽 끝에서 태어나 지금은 남쪽 끝인 제주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탈북화가 김정운 씨(38)의 일생은 이렇게 그림으로 요약된다.

# 탈북
정운 씨의 집안은 대대로 두만강과 떼어놓고 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중국에 넘어갔다. 그러나 고향을 멀리 떠날 수는 없어 두만강 옆 훈춘에 정착했다.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고 했지만, 증거가 부족해 북한 당국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두만강변에 살았던 북한과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았다. 정운 씨의 가족도 그랬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학생 때인 1950년대 초반 부모를 따라 다시 강을 넘어와 경흥에 자리 잡았고, 결혼한 고모들은 훈춘에 살았다. 그러나 1962년 ‘조·중 국경조약’이 체결되면서 이들 형제는 자연스럽게 북한 국적과 중국 국적으로 갈라지게 됐다. 그것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지 당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북한의 경제력이 좀 더 나을 때라 중국 사람이 된 이들은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두만강에 경비대도 생겨났고, 도강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흥에서 자란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탄광에서 일하게 됐고, 회령 처녀와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격차는 1980년대부터 눈에 띄게 달라지더니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다. 건너편 훈춘에선 개가 쌀밥을 물고 다녔지만, 이쪽 강변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죽었다. 특히 탄광마을인 아오지에서는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정운 씨도 학교 친구들이 굶어죽고, 장마당에서 시신이 뒹구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참다못한 정운 씨 가족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건너편에 고모들도 살고 있어 중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보다는 조건도 좋았다.

게다가 정운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서 환멸을 느낄 대로 느낀 상황이었다. 정식 의대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학의 침술에 빠져 오랫동안 독학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침을 놔주던 부친은 1990년대 초반 안전부에 체포됐다. 불법 의료를 했다는 이유였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1년 반이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정운 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석방돼 나올 당시의 참혹한 광경을 잊지 못한다.

“뼈만 남아 돌아오셨더군요. 온갖 피부병 때문에 몸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집안이 감시를 받았어요.”

이런 환경에서 탈북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누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넘었다.

1998년 봄. 내일이면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설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오늘밤 아버지와 누나가 있는 데로 간다”며 옷을 입혔다. 정운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둠을 틈타 강을 넘었다.

중국 시절의 김정운 씨. 2010년 자신이 그린 불화 ‘수월관음도’ 앞에 서있다. 김정운 씨 제공
중국 시절의 김정운 씨. 2010년 자신이 그린 불화 ‘수월관음도’ 앞에 서있다. 김정운 씨 제공


# 미술학원 선생님
훈춘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국경 옆에는 탈북자들을 잡으려는 공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정운 씨 가족은 고모들의 도움을 받아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牡丹江) 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가족은 주변 농촌마을을 돌면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정운 씨는 “이웃들의 눈이 무서워 1년에도 두세 번씩 이사를 다녔다”고 회상했다.

16세 정운 씨도 가족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중국말을 전혀 모르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 2년은 동네 꼬마대장 노릇을 하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18세 때부터 각종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힘들고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2001년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아르바이트 회사 사장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그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정운 씨는 학원원장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학원비는 돈을 벌어 내면 안 되겠습니까.”

원장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한 뒤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운 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1년쯤 지나니 원장은 그에게 학원 키를 맡겼다. 학생들이 돌아가면 학원을 청소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가 다닌 학원은 방학 시즌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방학 두 달 동안 그림을 배우려 다녔다. 학원에 학생들이 넘쳐나면 정운 씨도 원장을 도와 학생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줬다.

1년 반이 지난 2003년 어느 날 원장이 그를 불렀다.

“밖에서 버는 만큼 돈을 줄 테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때.”

정운 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그는 연변 출신의 강사로 신분을 속이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원장은 그에게 학원 관리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나중엔 원장이 할 일의 약 80%를 그가 챙겼다. 일이 늘었는데도 월급을 올려줄 기미가 없자 그는 2004년 말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의 딴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뒤 학원 원장은 그를 찾아와 “월급을 올려줄 테니 다시 돌아오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인연을 이어간 학원에서 그는 2007년 후반까지 일했다.

# 한국 입국
2007년 후반 또다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일이 생겼다. 우연한 기회에 산둥 성 칭다오(靑島)에서 그림 사업을 하는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그가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무단장에 놀러왔던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는 소개를 받고 정운 씨를 만났다. 그는 정운 씨의 그림을 본 뒤 칭다오의 자기 회사에 오면 한국식 그림기법을 가르쳐주고, 대우도 더 많이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망설임 없이 정운 씨는 다니던 학원에 작별인사를 하고 칭다오로 옮겨갔다. 새로운 스승 밑에서 정운 씨는 탱화(불화) 그리는 법을 배웠다.

칭다오는 한국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살았다. 이곳에서 정운 씨는 한국TV와 출판물을 실컷 봤다. 한국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부모와 누나 생각에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신변 불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상태에서 또 한 번 모험을 시도하는 것도 두려웠다.

정운 씨는 2011년, 3살 연하의 중국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녀 역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아들도 하나 생겼다. 학원 선생을 하면서 사두었던 가짜 중국 호적도 칭다오에선 별 탈 없이 통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모험은 정운 씨의 누나가 먼저 감행했다. 탈북도 누나가 먼저 했고, 한국에도 누나가 먼저 왔다. 한국에 온 누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면서 가족을 데려올 작전을 짰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구입한 가짜 호적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6년 4월 정운 씨는 부모님과 5세 된 아들과 함께 상하이(上海) 국제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출국 심사를 받는 동안 정운 씨는 떨리는 감정을 숨기느라 식은땀을 쏟아야 했다. 가짜 여권이 들통 나면 온 가족이 북송돼 고초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 가족은 누나가 알려준 대로 입국 심사를 받기 전 탈북 가족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족 모두 제주공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조사기관으로 가야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탈북민 정착 과정을 밟고, 2016년 8월 마침내 사회로 나왔다.

하나원에서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정운 씨는 주저 없이 제주도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제주도에 중국인 여행객이 많아 그동안 익힌 중국어를 활용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에 있던 2010년 불화 ‘아미타후불’을 그리고 나서 찍은 사진. 김정운 씨 제공
중국에 있던 2010년 불화 ‘아미타후불’을 그리고 나서 찍은 사진. 김정운 씨 제공


# 다시 그림을 그리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는 이듬해인 2017년 2월, 제주공항 면세점에 취직했다. 처음 왔을 때 제대로 구경조차 못했던 제주공항을 구석구석 다니며 중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미 그림은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탱화도 그렸지만 다른 작품도 그렸다. 2018년 이북5도청에서 주최하는 통일미술대전에 참가해 입상하기도 했다. 백발의 실향민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북한 땅을 쌍안경으로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올해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제주공항에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면세점에서 일하던 정운 씨도 자의 반, 타의 반 사직서를 쓰고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면세점에 취직하면서 3년 동안 돈을 모아 미술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가정이 안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남았던 아내는 2017년 한국에 왔다. 그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올해 딸도 얻었다. 그림으로 인연을 맺은 아내는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다. 정운 씨가 그림의 디자인과 설계를 하면 아내는 선과 보조색깔을 입힌다. 다만 올해는 아내가 딸을 출산해 정운 씨가 그림 그리기의 모든 과정을 다 맡고 있다.

일감이 많은 것도 아니다. 수입에서 작업실 운영비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입국한 지 4년 밖에 안 된 탈북민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판로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만 집중해 살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특히 그림을 완성하고 일화(一華)라는 자신의 호를 적어 넣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미래에 대한 불안마저 잊게 될 정도다.

“왜 하필 탱화를 그리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탱화 시장은 인공지능과 기계가 대치할 수 없는, 사람의 손이 반드시 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유행도 타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앞으로도 계속 사람이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라질 분야가 아닙니다.”

# 통일의 꿈
정운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중국에서 18년 살았으며, 한국에서 4년째 살고 있다.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날 만하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한족들과 살 때는 가끔 우리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한순간도 나는 한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들들은 저처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도록, 완벽하게 한국 남자로 키워 군에 보낼 생각입니다. 요즘처럼 모두들 애를 낳지 않는 때에 제가 셋이나 낳아 키우는 것 자체가 애국이 아닙니까.”

그의 말투는 함북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한국 표준어처럼 들린다. 정작 본인은 “가끔 경상도가 고향이냐는 말은 듣는다”며 머쓱해했다.

아들도 화가로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학교에선 소질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별로”라며 웃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TV나 휴대전화 게임, 유튜브 등에 영향을 받아서 배우는데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진득하게 오래 앉아 몰두해야 하는 그림과는 전혀 상극인 삶을 살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정운 씨는 제주도와 어울려 살기 위해 봉사도 열심히 한다. 지난해부터 매주 한 번씩 인근 지역 아동복지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지도한다. 지역 탈북민 봉사단체 부회장도 맡아 한 달에 한 번 노인복지센터에 가서 봉사도 한다. 3,4개월에 한 번씩 헌혈도 한다.

그에게 통일이 돼도 제주도에 계속 뿌리내리고 살 것이냐 묻자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가족들도 다 데리고요.”

지옥 같은 아오지를 벗어나 살기 좋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경흥과 인접한 나진, 선봉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를 낀 황금의 삼각주입니다. 자녀들에겐 제주도보다는 훨씬 더 큰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다도 끼고 있고요. 하하하.”

정운 씨 가족의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제주도 못지않게 푸르고 깨끗한 나진 바다에서 그와 함께 낚시를 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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