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사과 쇼’에 왜 우리가 ‘남남충돌’ 하나?[우아한 전문가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3일 0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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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중인 해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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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판덕 한국평화협력연구원·한국DMZ학회 이사(예비역 중령·북한학 박사)
유판덕 한국평화협력연구원·한국DMZ학회 이사(예비역 중령·북한학 박사)
이번에도 북한이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 구사해 왔던 ‘내정간섭 기술’이 그대로 먹히고 있습니다.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우리 공무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북한이 ‘자혜로운 통지문’ 한 장을 보내오자 여당의 분위기는 ‘규탄에서 호의로 돌변’하였고 정치권과 국민은 두 쪽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습니다. 북한의 ‘사과’를 칭찬하는 쪽과 비판하는 부류로 나뉘어 이전투구를 하고 댓글 총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남남갈등’을 넘어 총을 들지 않았을 뿐 내전을 방불케 하는 ‘남남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필자는 아래 다섯 가지 이유로 북한의 ‘통지문’ 발송을 ‘책임회피 식 사과 쇼’라고 봅니다.

첫째, 북한 지도부의 오래 된 전통인 ‘꼬리 자르기’ 전술이 드러납니다. 통지문에는 “정장의 결심 밑에 해상경계근무규정이 승인한 행동준칙에 따라 사격하였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또 “우리 지도부에 보고 된 사건 전말에 대한 조사 결과는 이상과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문장을 분석해 보면 ‘이번 사건은 자신들의 해역에 불법으로 침투한 ’불법 침입자‘를 자신들의 규정에 따라 대위급 정장의 결심 하에 우선 조치(사살)한 것이고, 지도부는 보고만 받은 상황이라 책임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꼬리 자르기’ 수법은 선대수령들이 애용한 ‘전가의 보도’ 같은 것입니다. 김일성은 1968년 1월 2일 저지른 ‘1.21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대해 1972년 5월 4일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며 “우리 내부에서 생긴 좌익맹동분자들이 한 짓이지 결코 내 의사나 당(노동당)의 의사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 김정일도 2002년 5월 13일 방북한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게 ‘1.21 사태’에 관련해 “극단주의자들이 잘못 저지른 일로 미안한 마음”이라 했고, 1974년 8월 15일 저지른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및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해서도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3대 수령 김정은의 ‘꼬리 자르기 사과 수법’은 거의 판박이 입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꼬리’가 “좌익맹동분자들, 극단주의자들, 하급자들”에서 “대위급 정장”으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변명의 이유’는 “내(김일성) 의사나 노동당의 의사가 아니”며 “(김정일)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과의 표현도 ‘대단히 미안한 사건, 미안한 마음’에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으로 바뀐 것에 불과합니다.

둘째, 사과의 내용도 부적절 합니다. ‘최고 존엄’께서 ‘대단히 미안하다는 뜻’을 ‘신하와 백성’에게 전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통지문 내용에는 “국무위원장 김정은 동지는 (중략)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 준 데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하시었습니다”라는 ‘김정은의 사과’ 문장(한 개 문장 117글자)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임금이 너그러운 마음에서 신하와 백성에게 ‘짐의 뜻을 전하라’는 어감을 갖게 합니다. 정말 ‘커다란 실망감을 주어 대단히 미안하고 충격 받은 남녘 대통령과 동포의 마음을 고려’했다면 왜 하급 기관(통일전선부)을 통한 ‘간접사과’가 아닌 본인 명의의 친서로 사과하지 못할까요.

셋째, 통지문에는 향후 남한의 공동조사 제의를 사전차단 및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 숨어있습니다. 통지문에는 “우리 지도부는 (중략) 앞으로 해상에서의 단속 취급 전 과정을 수록하는 체계를 세우라고 지시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바꿔 해석해 보면 ‘남측과 함께 공동조사를 해도 현재 우리 측에는 당시의 작전일지, 통신기록일지, 녹화영상 등 체계적인 자료가 남은 것이 없으므로 기대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조사 제의에 마지못해 응한다 해도 ‘자료가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면서 당시 투입된 함정의 작전(상황)일지, 상급 부대와의 교신일지, 사건 녹화영상 등 사고 조사에 필요한 일체의 자료를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넷째, 사과하는 주체의 격과 사과 받는 객체의 격이 터무니없습니다. 이번 우리 ‘공무원 총살 사건’은 국내법을 넘어 엄연하게 국제법적인 성격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국가 대 국가의 ‘사과’라면 형식과 격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통지문 발신자는 북한 노동당의 일개 부서인 ‘통일전선부’이고, 받는 수신처는 ‘청와대 앞’입니다. 자신들은 ‘최고 존엄’을 신적 존재로 여기면서 우리 국가와 정부의 상징인 ‘청와대’를 하부 기관 및 부서를 대하듯이 ‘앞’이라고 한 것입니다. ‘국가정보원 앞’이나 ‘통일부 앞’으로 했어야 맞습니다. 정말 오만하고 방자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이번 통지문은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라 ‘시혜성 립 서비스’에 불과합니다. 통지문 내용의 핵심은 ‘우리 수역에 침입한 불법 침입자를 해상경계근무규정’에 따라 사살했고, 국가비상방역규정‘에 따라 침입자가 타고 온 부유물을 소각했다. 다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북한 자신은 규정에 따라 정상적인 조치였으나, 인명손실에 대해서 유감으로 생각하니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지문 말미에다 “벌어진 사건에 대한 귀측의 정확한 리해를 바랍니다.”고 다짐해 둔 것은 아닐까요.

유판덕 한국평화협력연구원·한국DMZ학회 이사(예비역 중령·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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