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수가 50여 개, 연 매출이 20조 원이 넘는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4차례나 소환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3년 9개월째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파기환송심이 남아 있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부담이다. 이석채 전 KT 회장 이야기다.
KT 수사 개시와 기소 결정에 관여했던 서울중앙지검 간부 대부분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미 검찰을 떠났다. 최종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도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쪽은 6개월간 KT를 탈탈 털어가며 이 전 회장을 망신 주고도 무죄를 받은 검찰이다. 하지만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이 전 회장 몫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취임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부터, 지난달 물러난 김수남 전 총장까지 역대 검찰 총수들은 늘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 수술’ 같은 수사를 강조했다. 수사 대상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되며, 신사(紳士)다운 수사로 수사 결과에 승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처럼 자신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리한 수사와 기소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외과 수술식 수사’라는 해답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외과 수술 비유는 검찰의 수술(수사) 대상이 된 사람은 도려낼 환부(죄)가 있는 환자, 즉 죄인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 수사를 하며 불필요하게 원한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충고일 뿐, 수사가 꼭 필요한지 또는 기소를 안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의사라면 정밀한 진찰을 통해 수술이 필요한지부터 따져야 한다. 수술대에 오르는 일 자체가 환자에게는 위험이고 고통이다. 검찰 개혁은 환자만 보면 메스부터 들고 보는 식의 과도한 수사를 어떻게 막을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 단추는 검찰의 인사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돼야 한다. 현 체제는 언제라도 ‘제2의 이석채’를 낳을 수 있다. 서울중앙지검에는 특별수사부가 4곳, 첨단범죄수사부가 2곳, 그리고 강력부와 공정거래조세조사부라는 부서까지 있다. 이 전 회장 사건처럼 규모가 큰 경제 사건을 다루는 조사부도 두 곳이 있다. 이 10개 부서가 하는 일은 사실상 하나다. 거악(巨惡)으로 불리는 유력 정치인이나 대기업을 수사해 성과를 내는 것이다.
인지부서 수가 많다 보니 각 부서가 한 해에 처리하는 큰 사건은 많아야 1, 2건이다. 통상 임기가 1년인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들이 무혐의나 불기소 처분을 잘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검찰 간부는 “수사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면 검사 입장에서는 죄가 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뒤집어 보면 인지부서 부장검사의 인사 주기를 최소 3, 4년으로 늘리면 큰 사건도 소신 있게 불기소 결정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중요 사건에서 철저한 수사를 한다며 부장검사를 주임 검사로 지정하는 최근 관행도 문제다. 부장검사는 후배 검사의 수사가 올바른지 감독하는 게 임무다. 부장검사가 직접 수사를 하면 검찰 내부에서 잘못을 걸러낼 기회는 사라진다. 또 정권 임기 내에 본인 경력의 성패가 정해지지 않는 젊은 검사가 수사 책임자여야 정치로부터의 독립성도 커진다. 인사로 수사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 개혁 논의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처럼 수사권을 누가 갖느냐에 맞춰지는 것은 재고돼야 한다. 검찰 개혁의 목표는 그릇된 수사로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일을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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