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2009년 그날 盧의 유서처럼… 정치인 ‘운명’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 문재인 인생역정의 ‘사건’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는 자서전 ‘운명’에서 평생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과 이후의 삶을 운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평범하게 살려고 했던 꿈을 접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상황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 가난이 준 선물

문 후보는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에서 6·25전쟁 중 피란살이하던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해 어머니가 좌판 행상과 연탄배달 등을 하면서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어린 시절 가난은 그를 지겹게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쳐 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며 가난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1975년 4월 경희대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이끌었다. 시국토론을 하고 유신독재 화형식까지 치른 그에게 돌아온 것은 구속과 제적이었다. 경찰에서 열흘간 조사를 받고 검찰로 넘어갈 때 호송차 뒤편 구멍으로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를 외치던 어머니의 모습은 호송차가 떠나면서 금세 멀어졌다. 그는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구치소에서 나온 뒤 강제징집돼 특전사에 배치됐다. 구치소 시절 훗날 평생의 반려자가 될 김정숙 씨와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고,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1978년 2월 제대한 문 후보는 1980년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2등인 데다 수료식에서 법무부 장관상을 받았기에 판사로 임용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신반대 시위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은사의 검사 임용 지원 권유를 거절한 채 변호사 개업으로 방향을 바꿨다.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1982년 부산에서 개업을 하려고 할 때 사법시험(22회) 동기인 박정규 전 민정수석으로부터 평생 동지가 될 한 남자를 소개받는다.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던 사람, 자신이 변론했던 1981년의 ‘부림사건’ 경험을 얘기하면서 유신반대 데모 때문에 판사 임용이 안 된 것에 진심으로 함께 분노해 줬던 사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법무법인 ‘부산’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모임 대표 등 부산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그런 면에서 금방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문 후보는 1982년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이는 노 전 대통령이 일곱 살 많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늘 그에게 높임말을 썼다. 웬만하면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였지만 끝내 노 전 대통령을 일컬어 ‘형님’은커녕 ‘선배님’이라고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2002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이 부산 선거대책본부 출범식에서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며 그와의 특별한 우정을 강조했다.

○ 정치인 문재인으로 홀로서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아 달라.”

2003년 1월 13일 문 후보를 만난 당선자 신분의 노 전 대통령은 “달리 맡길 사람이 없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즉답을 피한 채 며칠간 시간을 달라고 하자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부산으로 내려와 일주일간 고민했다. 그러고 노 전 대통령의 개혁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1, 2년 눈 딱 감고 ‘죽었다’ 생각하고 일하다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자”는 생각이었다.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공직은 민정수석으로 끝을 내며, 정치하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끝내 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문 후보를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의 ‘징발론’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권의 출마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2004년 2월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히말라야로 향했다. 취미인 바둑과 등산, 스킨스쿠버 등을 즐기며 자유인으로 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3월 노 대통령의 탄핵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탄핵재판이 끝나고 사흘 뒤 그는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거치며 노 전 대통령과 임기 대부분을 함께했다.

“실장님 지금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2009년 5월 23일을 그는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던 ‘그날’로 기억한다. 노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며 조용하게 살고자 했던 그의 계획도 뒤헝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토록 정치를 싫어했던 그가 ‘정치인 문재인’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맡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로 야권통합의 산파역을 자임했으며, 비록 낙동강 전투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4·11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자서전 ‘운명’은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로 끝난다. 노 전 대통령이 남겨놓은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는 노무현의 치열함이 늘 자신을 각성시켰다고 했다. 이제 험난하고 복잡한 대선가도를 헤쳐 나가야 하는 숙제는 고스란히 문재인의 치열함의 몫으로 남게 됐다.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채널A 영상] 친노 좌장 ‘노무현의 그림자’…문재인은 누구인가


#민주당#문재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