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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9월 28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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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부모, 친척, 형제도 없이 나 혼자 이곳에 와서….”
6·25전쟁 국군포로인 이쾌석 씨(79)는 26일 남측의 동생 정호 씨(76)를 만나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59년 만에 동생을 만난 이 씨는 어머니가 13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 “나는 어머니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제 너를 만나 너무 기뻐 눈물도 나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내가 너와 부모님한테 죄를 지었다”며 상봉 내내 정호 씨의 손을 놓지 못했다.
장남인 이 씨는 1950년 가족들과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가 징집됐다. 입대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다시 집을 찾았지만 가족과 만날 수 없었다. 가족들은 1960년 전사통지서를 받았고 줄곧 죽은 줄만 알았다가 올해 6월에야 이 씨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씨는 “징집돼 군대에 갔다가 이곳(북한)에 왔지만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아픈 곳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 정수 씨(69)도 큰형과 재회했다.
이 씨는 27일 오전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개별상봉 때 동생들이 가져온 부모님의 생전 사진을 꼭 쥔 채 한참을 뚫어지게 보다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정호 씨는 형에게 술을 선물로 준비했지만 이 씨는 “이 술은 다시 부모님 영전에 가져다 드리고 어머니께 내 안부를 전해드려라”라고 말했다. 정호 씨는 “어머니 앞에 가서 꼭 형님이 살아있다고 말하겠다. 어머니가 많이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국군포로는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교환으로 종료됐고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지금까지 국군포로 12명이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 ‘특수이산가족’ 형태로 남측의 가족을 만났다.
▼초면의 北올케 “아버지 덕에 잘살고 있다”
1987년 납북 동진호 선원, 노성호-진영호씨 누나 상봉
“배 타지 말라고 말렸건만”성호씨 누나 회한의 눈물
영호씨는 1시간동안 침묵▼
1987년 1월 어선 ‘동진27호’ 선원 노성호 씨(당시 26세)는 “지난번 배 탄 돈을 못 받았으니 이번에 마지막으로 가겠다”며 기어이 집을 나섰다. 누나 순호 씨(당시 28세)가 “배 타는 일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니 가지 말라”고 말렸건만…. 동진27호는 그해 1월 15일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하다 북한에 나포됐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26일 성호(48) 순호 씨(50) 남매는 중년의 나이가 돼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순호 씨는 26일 오후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동생 성호 씨와 그가 북에서 결혼한 부인 윤정화 씨(44), 딸 충심 씨(21)를 상봉했다.
이번 추석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는 동진27호 선원 성호 씨와 진영호 씨(49) 등 납북자 2명이 남측 가족과 만났다. 순호, 성호 씨 남매는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순호 씨는 “그때 동생의 승선을 결사반대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누나로서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성호 씨는 “결혼해 잘 살고 있다”면서도 “고향과 누나 생각을 한시도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순호 씨는 “가정을 잘 이루고 있어 대견하다”며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순호 씨는 27일 오전 개별 상봉을 마친 뒤 “동생 얼굴에 근심이 있어 보여 걱정이다. 북한에서 잘 있다는 얘기가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진영호 씨는 26일 22년 만에 남측의 누나 곡순 씨(56)를 만났지만 1시간 동안 긴장한 표정으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1시간여 뒤 영호 씨는 “남한에서 나쁜 일을 저질러 경찰을 피해 배를 탔다”며 “남조선에 있었으면 결혼해 집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대화는 주로 북한에서 결혼한 부인 안금순 씨와 딸 선미 씨가 했다. 안 씨는 “아버지(고 김일성 주석)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 ‘고난의 행군’(기간)을 걱정 없이 살았다.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잘살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단체 상봉을 마친 뒤 곡순 씨는 “동생이 납북 이유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진27호 선원 12명 중 지금까지 6명이 남측 가족들과 상봉했다.
▼병색의 68세 아들에 “나보다 젊은 애가 왜 이러냐”
95세 실향민 정대춘씨▼
26일 금강산면회소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단체상봉에서 남측 최고령 상봉자 정대춘 씨(95)는 헤어진 60년 동안 자신보다 더 건강이 쇠락한 북측 막내아들 완식 씨(68)의 손을 잡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의 마른 몸매와 검게 탄 피부, 연방 흔들어 대는 손은 그가 병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 씨는 또박또박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나보다 젊은 애가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를 찾으려고) 너무 생각했구나.”
정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완식 씨는 흔들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난해부터 신경 이상으로 손을 떤다”고 말했다. 정 씨의 손자 명남 씨는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며 처음 본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정 씨는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사망했다”는 아들의 말에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정 씨는 “그래도 이제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과 서울을 오가며 사업(유통업)을 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측에 발이 묶였다. 이후 북한의 두 아들과 딸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정 씨가 남측에서 낳은 아들 태근 씨(48)는 “북한에 있는 자식들을 보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면서 “10년 전부터 ‘정대춘’이라는 이름으로 상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이번엔 북한에서 쓰던 이름인 ‘정운영’으로 신청했는데 북측의 답변이 왔다”고 말했다.
당초 이번 1차 상봉단의 남측 최고령자는 박양실 씨(96)였지만 부산에 있는 집에서 넘어져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딸 이언화 씨(61)와 만날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박 씨의 아들 이대원 씨(63)가 여동생을 만났다.
싹싹해진 北… 가요방송 소음 지적에 바로 꺼
■ 상봉행사 이모저모
○…“어머니는 아파서 못 왔습니다.” 석찬익 씨(89)는 백발로 나타난 아들 하준 씨(62)를 만난 기쁨보다 아내 정태연 씨(81)를 만나지 못한 것이 서글퍼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정 씨는 허리를 크게 다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석 씨는 1948년 혼자 월남했다. 아내에게 끼워주려고 가져온 금반지는 손자 광일 씨(35)에게 전했다. 광일 씨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은 심정은 할머니가 더 큽니다. 마음고생 많았던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더 늙었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라고 말했다.
○…강범락 씨(84)는 59년 만에 북측의 두 아들을 만나 아내의 생사를 물었지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 경수 씨(59)는 “아버지가 떠날 때 제가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다”며 “그때 남긴 것이 생각나시느냐”고 물었다. 강 씨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자 경수 씨는 “어머니에게 빨간 수첩을 주시며 ‘꼭 간직하라’고 말씀하셨다”며 수첩을 꺼냈다. 강 씨는 수첩 속 빛바랜 사진의 흐릿해진 아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뒤 나지막한 소리로 “내가 자식들에게 죄를 졌다. 아버지 소리 들을 자격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27일 오후 12시 반경 공동 점심식사에 참석하기 위해 금강산호텔 2층 연회장 계단을 오르던 남측 유재복 씨(75·여)가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대한적십자사 측이 준비한 앰뷸런스 편으로 남측으로 이송됐다. 의료진은 “외상은 없고 머리가 조금 부었지만 정밀한 진단이 필요한 상태”라고 말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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