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블로그]김일성 장례식에 나타난 의문의 세 미녀

  • 입력 2009년 7월 14일 10시 28분


만수대 김일성 동상 앞에 헌화하는 북한 주민들.
만수대 김일성 동상 앞에 헌화하는 북한 주민들.
유리관 속에 있는 김일성 시신
유리관 속에 있는 김일성 시신
평양시내를 돌았던 김일성 영구차
평양시내를 돌았던 김일성 영구차
(앞글에 이어) ▶[기자 블로그]1994년 7월 8일-김일성종합대학에서

7월 9일부터 새벽 3시에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일과가 7월 20일까지 반복됐다. 원래 김일성 장례는 10일장으로 17일까지 하기로 했는데 김정일이 “우리 인민의 슬픔이 너무 커서 3일 연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매일 용남산 동상에 올라가 호상을 서든가, 만수대동상 앞에 가서 호상을 서든가 해야 했다. 특히 매일 꽃을 동상 앞에 가져다 놓아야 하는데 평양과 같은 도시에서 꽃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지방에선 산에 올라가 꽃을 꺾었다고 하지만 평양 시내서 산은 너무 멀리 있고 대규모 화훼단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꽃은 식물원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간부들부터 가져가면 일반 평민이 꽃을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들이 산을 헤매면서 꽃을 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멀리 산에 가서 꺾어다가 몰래 꽃 장사하는 할머니들이 나타났다. 공산주의 교육을 아무리 몇 백 년을 해봐야 돈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이 부지기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걸...그런 본성을 거스르는 공산주의 교육은 그래서 잘못됐다고 본다. 물론 인간의 본성만 강조시켜 극도의 개인 이기주의만 조장시키는 사회 역시 바람직하지 않지만...

한번은 김일성 애도기간인데도 대성구역의 농장에 나가 김매기를 도와줄 때가 있었다. 그때 마침 평양식물원이 가까이에 있어서 우리가 이때라 생각하고 꽃을 얻느라 필사적으로 행동했던 것이 생각난다. 돈 많은 애들은 돈을 주고 관리원을 유혹하고 돈 없는 기숙사생들은 그들대로 몰래 재간껏 훔치고 했다.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모두들 이렇게 꽃을 얻지 못해 필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유일한 이유는 당시 꽃이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계산하는 ‘징표’이자 ‘화폐’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초급단체 비서라는 인간이 매일 수첩에 누구는 꽃을 얼마나 가져왔고, 누구는 한 송이고, 누구는 꽃다발이고, 누구는 화환이고 하면서 기록하지만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랬을까. 매일 저녁 총화 때마다 “너는 꽃 한번도 안냈어?”하는 질책이 “이런 비상상황에서 너는 반동인 것이 증명된다”고 하는 낙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대학에선 학부끼리 비교하면서 경쟁시켰고, 학부는 다시 학년별로, 학년은 학급별로, 학급은 학생별로 경쟁시켰다. 위에서 내리내리 내려온 것이다. 대학은 또 대학끼리 경쟁했다. 특히 김일성대는 다른 모든 대학에 비교해서 절대 질 수가 없다면서 더욱 채찍질했다.

아무튼 이런 때조차 돈 많은 집 자식들은 충성심도 더 많이 살 수 있었다. 매일 꽃바구니를 만들어오는 인간들도 있었으니...물론 애도기간이 끝난 뒤 합당한 평가를 받았다. 뭐 평가라고 해봤자 돈으로 인센티브해주는 것도 아니고 “넌 충성심이 높다”는 평가만 말로 들은데 불과했지만...북한에선 결국 ‘돈이 많으면 당에 대한 충성심도 높다.’

기억나는 일 중의 하나는 북한 TV에서 유리관 속에 놓인 김일성 시신이 처음으로 공개됐을 때이다. 김정일이 핼쑥한 얼굴로 나타난 것도 기억에 남았지만 그 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은 김정일과 김경희 다음쯤으로, 그러니깐 중앙당 고위간부들이 그 유리관을 돌기 전에 젊은 미녀 3명이 그 유리관 앞에 엎드려 우는 장면이 화면에 잡힌 것.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궁금증은 가졌을 것이다.

“엉, 저 여자들은 누구지?”

젊은 여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젊은 남성들은 화면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당시 북한 대학생들의 차림새와 비슷한 옷차림인데 나이는 비슷해보였다. 머리 스타일과 키도 비슷했다. 보통 크기보다 좀 더 커 보였다.

“김정일의 자식들인가? 그런데 아들이 있을 것인데 아들은 안보이고 딸만 셋이 나타났나...그런데 딸이 세 명인가? 하지만 딸이라면 연령대가 좀 차이나야 할 것인데 저 세 명은 나이도 비슷해 보이니 참 이상하다....말로만 쉬쉬 돌아가던 그 '김일성 만수무강조'였던가...얼굴이 예쁘긴 하네. 그렇지만 전국에서 몇 명만 골라 뽑을 정도의 재색도 아닌데...혹시 간호사들인가....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만수무강조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어린 처녀들이 김일성에게 젊음을 선사하기 위해 각종 재롱을 부리면서 웃음을 주는 그런 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쉬쉬하면서도 설마 성적 만족까지 제공한다는 식의 추측은 누구도 못했다. 앞의 말은 혹 보위부 귀에 들어가는 경우라도 의미를 비틀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나'는 생각에 말했다고 변명하면 그나마 살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이지만 뒤의 말은 추적이 들어오면 무조건 3대 멸족이기 때문이다.

그 아가씨들이 누구였던가 하는 궁금증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하도 김정일 가족에 대해선 베일에 감추고 사는 북한이니 김일성 장례식에 나타난 젊은 세 여자, 그리고 고령의 중앙당 고위간부들보다 문상 순위가 위인 저 여성들이 누구인지 관심이 끌리는 것은 당연지사. 북한 사람들이 애통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한 순간 눈이 반짝반짝해졌을 것 같다.

이 장면은 생중계 과정의 실수였던 것 같다. 김정일이 조의를 표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재방됐는데 그 여성들이 잡힌 화면은 생방 이외에서는 다 삭제됐던 것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북한에서 1호 방송기자 또는 사진기자 하려면 골치가 좀 많이 아프다. 1호 방송기자는 김 부자를 담당 촬영하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로 말하면 청와대 출입기자라고나 할까. 대우는 최상으로 받지만 정말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례로 김일성은 목덜미에 혹이 있다고 절대 뒷모습이 찍혀선 안 된다. 그리고 김일성이 부인을 대동해 온 외국 수반을 만나면 의전상 부인인 김성애와 함께 나가야 하지만 절대 김성애가 사진에 나와선 안된다. 그러니 김일성이 김성애를 가리도록 각도를 잡아서 찍어야 한다. 김정일은 키가 작기 때문에 옆에 키 큰 사람이 있을 때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 등등 규정이 하도 많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조의장면은 미처 지침이 없어 실수했던 것 같다. 원래 그런 경우는 젊은 여성들이 나와 조의하면(물론 카메라 기자가 그들이 누군지 모를 확률이 크겠지만) “앗 이상하다”고 판단하고 카메라 앵글을 딴 곳에 돌려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위험때문에 북한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방송은 거의 없다. 생방송 자체를 거의 보기 힘들지만 그 생방송이라는 것도 사고에 대비해 실제와 몇 분 시차를 두고 방영하기 때문이다.

그해 삼복 모진 더위에 사람이 진이 다 빠져 허덕일 때쯤 김일성 장례 일정이 끝나고 7월 20일이 왔다. 김일성 영구차가 평양시내를 돌 때였는데 이때 평양 100만 시민이 몰려나와 울고불고했던 장면이 서울에도 방영됐던 것으로 안다.

우리는 이날 전날 10시에 자고 새벽 2시 반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우리에게 지정된 위치로 나갔다. 행사도로는 다 군인들에게 차단되고 연도에 나가기 전 200미터 앞에서 차단 바리케이드를 통과해야 했다. 학급별로 4시에 행사장 가까이에 도착한 다음, 보위부 요원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한다. 명단에 있는 이름과 자기 신분증이 일치해야 통과시키며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으면 돌려보낸다. 죽은 시신도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사람에 준해 경호를 받았던 것이다.

김일성대가 설 연도구간은 개선문, 김일성경기장 앞에서 우의탑 앞까지 약 500미터 정도였다. 여기는 평양시내를 다 돌고 마지막 코스쯤 되니 영구 차량은 12시 거의 돼서 나타났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나가는 속도가 우리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이 장면을 보려 10시간 가까이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시속 한 30키로 정도로 우리 앞을 순식간에 지나갔다.

영구차가 나타나자 앞줄에서 “수령님”하면서 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앞줄은 교수들이 차지했다. 나이가 40이상인 사람들은 그나마 다 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은 어깨어깨 사이로 목을 빼들고 차를 보는데 더 관심이 있어 했다. 일부 학생은 인도 옆 언덕에 올라 지켜보기도 했다.

나는 행사가 끝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김일성대 학생들 중에 눈물을 훔치는 학생이 전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본 학생들 중에는 우는 사람이 없었다. 놀라워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멀리 앞쪽에도 살펴보았는데도 그러했다.

교수들은 엉엉 울었는데 말이다. 나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지금도 그 놀라움이 생생하다.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간직하고 있던 나는 그렇다 쳐도, 그래도 김일성이 마지막 길을 떠나는 순간에 이 체제에서 혜택 받고 수혜를 받은 고위 간부집 자식들은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내게 있었던 것 같았다. 다른 학생도 아니고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대 학생들, 북한에서 가장 충성심이 있다는 김일성대 학생들이 말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울지 않았다. 지금껏 십여 일을 시달려서 눈물이 말랐단 말인가. 그래도 나이든 세대는 다 울었지 않는가.

그때 본 충격이 마음에 남아 있어 나는 누가 물어보면 선뜻 대답한다.

“충성심이요? 그런 거 젊은 세대는 없어요. 있는 척 할 뿐이지.”

물론 김일성대 학생들은 그나마 북한에서 엘리트들이어서 이미 ‘충성심’의 본질을 깨닫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식인이 아닌 계층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북에서 “농민들이 가장 슬퍼했다”는 말이 있었다.

10년 전부터도 북한에는 “진짜 충성계층을 만나려면 심심산골 농민들을 찾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돈다. 그때도 그랬으니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 또 시장경제화 되고 있는 지금은 김정일과 노동당에 대한 충성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 든다.

김일성 영구차를 지나보내고 학급별로 출석 장악을 했다. 다 참가했는지 점호해보는 것이다. 아무렴 그런 날, 그런 행사에 목이 두개가 아니고서야 누가 빠진단 말인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왔다.

점호가 끝난 뒤 모두 헤어져 기숙사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좀 넘었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났던 우리는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목욕을 하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우리가 잠들던 그때 TV 화면에서는 사람들이 오열하고 있었다.

▶ 주성하 기자 블로그에서 ‘김일성 장례식에 나타난 의문의 세 미녀’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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