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법안전쟁 종료 5분전 어처구니없는 자살골로 마감”

  • 입력 2009년 3월 5일 02시 58분


■ 쟁점법안 무산 마지막날 무슨일이

19:00- 본회의 2차례 연기 끝 與 171명중 103명만 참석

23:00- 李부의장 “발언시간 제한”… 본회의장 아수라장

23:35- 金의장 “그만하라,법안처리 못한다” 호소 안먹혀

23:58- 민주 이종걸의원 반대토론 나서 표결 끝내 무산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3일 여야는 하루 전에 합의한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주요 쟁점법안들은 야당의 의사진행 방해 때문에 처리되지 못했다.

무기력하고 안이한 한나라당의 태도도 한몫했다. 거대 여당이면서도 법안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상황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야당의 무책임, 여당의 자살골=이날 국회 본회의는 당초 오후 2시부터 열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의 법안 처리 지연과 민주당의 의원총회 때문에 오후 5시로, 다시 오후 7시로 두 차례나 미뤄졌다.

오후 7시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이라도 정족수를 확보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의석에는 103명만 앉아 있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30명 정도가 지역구 등에 내려가 있었고 일부는 해외로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며 “부랴부랴 불참자를 불러모아 오후 9시에야 겨우 회의를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재촉 속에 김형오 국회의장은 법안 처리를 서둘렀다. 그러나 야당의 지속적인 의사진행 방해로 회의는 더디기만 했다.

더욱이 회기 마감을 1시간 정도 앞두고 야당 의원들이 잇달아 반대토론 신청을 했다. 김 의장 대신 의사봉을 잡은 한나라당 출신 이윤성 국회부의장은 미숙한 의사 진행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오후 11시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은 이 부의장에게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법안(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에 대한 반대 토론을 신청했다. 직전에 민주당 의원이 7분간 반대토론을 막 마친 뒤였다.

이 부의장은 “쟁점법안 말고도 (아직 처리 못한) 민생법안이 30개나 포함돼 있다. 발언 시간을 5분에서 3분으로 제한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당은 국회법 조항을 거론하며 반발했다. 본회의장은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

반대토론에 나선 유 의원은 오락가락하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그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을 ‘독점거래법’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출총제를 유지해야 한다면서도 “공정거래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이 부의장이 “취지에 맞게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유 의원은 “제 마음입니다”라며 막무가내였다.

오후 11시 24분에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산업은행 민영화법안 중 하나인 한국정책금융공사법안에 대해 반대토론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 부의장은 “신청서가 접수되지 않았다”며 법안 표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야당 의원 10여 명이 단상으로 몰려들면서 다시 소란이 벌어졌다.

본회의장이 난장판이 되자 당시 의장실에서 미합의 쟁점법안의 처리 문제를 검토하던 김 의장은 오후 11시 35분에 다시 의장석에 섰다.

남은 시간은 겨우 25분밖에 없었다. 김 의장은 쟁점법안 중 마지막으로 남은 저작권법안을 상정했다. 이번에는 자유선진당 김창수 의원이 반대토론을 벌였다.

김 의장이 “이제 그만하세요. 이러면 법안 처리 못합니다”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마이크가 꺼진 상태에서 발언을 계속했다.

김 의원의 발언이 끝난 시각은 오후 11시 58분. 이번에는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반대토론에 나섰다. 김 의장은 법안 표결을 시도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의원의 반대토론 발언을 허용하는 바람에 여야가 합의한 일부 미디어 관계법안과 은행법안 처리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날 마지막 한 시간 중 반대토론과 야당의 국회의장에 대한 항의로 허비한 시간은 모두 37분이나 됐다.

▽네 탓 공방 속 자성론도=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민주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4일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야당이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일부를 위약해 마지막 오점을 남겼다”고 말했다.

여야 합의 후 여당으로서의 자신감을 찾는 듯하던 당내 분위기도 썰렁하게 바뀌었다. 딱 하루만이었다. 자성론도 나왔다. 정작 한나라당 의원들의 회의 참석률이 낮아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이 바람에 본회의가 예정 시각에 열리지 못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조해진 의원은 4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거대 여당을 자책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어제 본회의 법안처리 실패 사건은 원내지도부와 국회의장단의 무능, 무책임을 웅변한 표본”이라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또 “여당 최초의 국회의사당 농성으로 시작한 사흘간의 법안전쟁은 막판 어처구니없는 패배로 끝났다”면서 “경기 종료 5분 전 자살골로 마감하는 축구경기를 보는 듯했다”고 어설픈 한나라당의 전략을 질타했다. 조 의원은 “이 지도부와 의장단으로는 국회를 제대로 이끌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굳혀진 참담한 밤이었다”고 토로했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미디어 관계법안과 금산분리 완화법안 가운데 어느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했는데 도대체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

민주당의 내홍은 하루 만에 가라앉았다.

원혜영 원내대표는 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의 무책임, 무원칙, 무능함이 법안 처리를 막았다”며 여당 책임론을 강조했다. 당 최고위원회의는 이날 만장일치로 원 원내대표의 재신임을 결정했다. 미디어법안 처리 시기를 못 박으면서 불거진 당내 분란은 이에 따라 봉합됐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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