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 北에 달렸다” 김정일에 메시지

  • 입력 2007년 9월 8일 02시 59분


손잡은 韓-中 정상 노무현 대통령이 7일 호주 시드니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시드니=김경제 기자
손잡은 韓-中 정상 노무현 대통령이 7일 호주 시드니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시드니=김경제 기자
7일 오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 북측에 전한 메시지는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룰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가 즉각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6·25전쟁에 대한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공동 서명할 수 있다는 의지를 밝힌 것도 북한이 갈망하는 북-미관계 정상화 역시 북한의 ‘전략적 결단’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한 것.

부시 대통령이 “평화체제 제안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김 위원장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 것도 북한에 공이 넘어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핵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6자회담이 북핵 불능화 단계에 순조롭게 진입하는 상황에서 10월 2∼4일 열릴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성과를 낼 경우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시드니 구상’이 조기에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다.

▽속도감 있게 진행될 평화체제 논의=이날 한미 최고지도자가 밝힌 평화체제 관련 구상은 그동안 미국에 대해 ‘대북(對北)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해 온 김 위원장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며 이번 회담에서 자신의 평화협정 체결 의지를 김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고 한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임기 내에 북핵 문제를 해결해 외교적 치적을 남기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부시 대통령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처음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6·25전쟁에 대한 공식종료 선언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31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임기 내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려면=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6·25전쟁에 대한 종전선언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날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노 대통령은 다음 달 남북 정상회담에서 6·25전쟁의 종전선언 문제를 깊이 논의할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 정상과 부시 대통령이 한 장소에 모여 종전선언 협정서에 서명하는 역사적인 행사가 열릴 수도 있다. 장소는 유엔군이 관할하는 판문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전쟁의 한 당사자이자 향후 종전협정 서명과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참여하게 될 중국의 반응도 호의적이다. 이날 오전 열렸던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6자회담의 의장국이자 정전협정의 서명국인 중국 역시 6자회담의 진전 정도에 따라 평화체제 논의에 속도를 내자는 데 공감대를 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 파병 연장?=한편 노 대통령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올해 말까지인 이라크 파병이 연장될 수도 있음을 시사해 주목된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에서의 지속적인 협력 요청에 대해 “국회와 많은 대화와 협의를 통해 우리가 동맹국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 나갈 것”이라고 했다.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자이툰 부대와 관련한 국회 보고 때 ‘앞으로 하반기 이라크의 전반적인 상황을 다시 점검해서 답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답에 대해서는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시드니=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평화협정::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나라나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평화상태를 회복하거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맺는 협정. 북한은 1974년부터 정전협정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을 제외한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은 실질적 교전당사국으로서 협정 체결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사자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盧대통령 “말씀 빠뜨리신 것 같은데…”

부 시 “더 어떻게 분명히 말할지…”▼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55분간 정상회담을 한 뒤 15분 동안 회담 내용을 언론에 설명했다.

노 대통령과 8번째인 이날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핵 불능화를 전제로 한 북-미 평화협정 체결 의사를 밝히며 “우리 둘이 친한 친구 사이니까 내 뜻을 김정일(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잘 전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 후 ‘언론 회동(press availability)’ 형식으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노 대통령을 “미스터 프레지던트(Mr. President·대통령님)”라고 정중하게 불렀고, 말미에서도 “생큐 서(thank you sir)”라고 했다. 2003년 5월 첫 회담 때는 노 대통령을 ‘이지 맨(easy man)’이라고 불렀다.

전에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했던 부시 대통령은 이날 김 위원장을 지칭할 때는 ‘김정일’이라고만 했다.

한편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공개된 자리에서 ‘종전선언’과 ‘평화체제’와 관련해 커뮤니케이션이 다소 헝클어지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각하께서 조금 전 말씀을 하실 때 한반도 평화체제 내지 종전선언에 대해 말씀을 빠뜨리신 것 같은데, 우리 국민이 듣고 싶어 하니까 명확히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고 주문하자 부시 대통령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평화체제를 제안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김정일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재차 “똑같은 이야기다. 김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말하자 부시 대통령은 “더 어떻게 분명히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전쟁은 우리가 끝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김정일이 그의 무기에 관해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해야 할 것 같다”고 다시 말했다.

노 대통령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듯한 인상을 풍겨 ‘외교 결례’ 논란이 빚어지자 청와대와 백악관은 “통역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회담 중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차원에서 논의돼 온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이란 용어 대신 ‘평화조약(peace treaty)’이란 표현을 써 이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빚어졌다. ‘조약’은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며, 통상 ‘협정’의 상위개념이기 때문. 정부 고위 당국자는 “엄격한 법적 개념이라고 보지 말아 달라. 평화협정과 평화조약은 평화체제의 제도화를 위해 쓰는 다양한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6자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은 특정 회담이 앞서가거나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라는 뜻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 주석도 이 같은 의견이 바람직하다며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이날 오전 호주 시드니 시내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비즈니스 지도자 회의 연설 중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를 ‘OPEC(석유수출국기구)’로 잘못 말하는 등 말실수를 연발했다. 부시 대통령은 APEC 회의 주최국인 존 하워드 호주 총리에게 “이처럼 훌륭한 OPEC 정상회의에 초대해 줘 고맙다”고 말했다.

청중이 웃자 부시 대통령은 곧바로 “APEC 정상회의”라고 정정하며 “그(하워드)가 내년 OPEC 정상회의에 나를 초대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호주는 OPEC 회원국이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또 호주의 이라크 파병에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n) 군대’를 ‘오스트리아(Austrian) 군대’로 잘못 말해 호주인들의 자존심을 긁었다.

시드니=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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