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북에 남은 가족에게 南과일 잔뜩 보내주고 싶어”

  • 입력 2007년 2월 17일 15시 16분


탈북자 김춘애 씨
탈북자 김춘애 씨
●남한에서 네 번째 ‘설’을 맞는 탈북자 김춘애 씨의 사연

“북에 남은 가족에게 남한 과일 잔뜩 보내주고 싶어요”

설을 이틀 앞둔 16일 저녁, 서울 광화문 근처 한 커피숍에서 탈북자 김춘애(가명·52) 씨를 만났다. 그는 2003년 6월 한국에 입국했다. 지금은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아담한 보금자리에서 자녀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설이면 술, 담배, 바나나, 고기 등 배급품 나와”

김 씨는 한국에 온 이후 올해로 네 번째 설을 맞는다. 그는 지난 4년간 남한에서 겪은 ‘명절’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의 설 풍경을 비교했다.

“북에서는 설이 되면 술 한 병, 고급 담배 두 보루, 바나나 한 개, 약간의 사탕과자를 나눠줘요. 고기도 1인당 200그램씩 배급해주죠. 그러면 배급품을 갖고 시댁에 가서 식구들과 함께 먹어요. 하지만 지방에 시댁이 있는 사람들은 못 가요. 이동에 자유가 없으니까요.”

작지만 술과 고기가 나왔을 때는 그나마 행복(?)했다. 1990년대 들어 함경북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김 씨가 살던 평양은 1995년부터 없어졌다. 그때부터 풀뿌리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북에서는 설이 되면 걱정이 태산이었어요. 배급도 끊어져서 먹을 게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사먹으면 되잖아요. 먹을 것에 대한 고민을 안 하는 것만도 대단한 거죠.”

김 씨는 먹고살기 힘든 북한이었지만 잊지 못할 추억도 많다.

“북에서는 설이면 눈이 올 때가 많았어요. 눈 치우던 기억이 지금도 오롯하네요. 그리고 4월 15일 태양절에는 가족과 함께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탔고, 10월 10일에는 김밥과 국수를 준비해서 개성산에 있는 동물원에 간 것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북에선 설날에 제사 안 지내요. 추석에만 지내요”

김 씨는 남북의 다른 설 문화도 소개했다.

“북에서는 양력설을 세요. 1월 1일부터 3일까지 쉬죠. 음력설은 하루만 쉬어요.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설맞이 공연을 개최해 평양 주민들은 무조건 보게 해요.”

그는 남북의 가장 다른 점은 ‘제사’라고 했다.

“북에선 설날에 제사도 안 지내고 성묘도 안 해요. 추석에만 해요. 요즘은 아이들도 남한에 온 만큼 남한 법을 따라 설날에 아버지 제사라도 지내자고 해요. 그때마다 저는 ‘이때까지 안 하던 제사를 지내면 좋지 않다고 하더라’며 하지 말자고 하죠. 아이들이 몹시 서운해 하더군요.”

그는 “설이 되면 남한에서는 한복을 입지만 북에서는 한복을 전혀 입지 않는다”며 “다만 설날 아침에 아이들이 어른들께 세배 드리고, 세뱃돈 받는 건 같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차례도 안 지내고, 친척도 없기 때문에 설이 되면 달리 할 게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게 가족여행이다.

“북에서는 통행증이 없으면 여행을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여기는 이동에 제한이 없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지난 설에는 서해바다로 갔고, 올 설에는 동해 쪽으로 바다 구경을 가려고 해요.”

그는 매년 설이 되면 아이들에게 꼭 듣는 말이 있다고 했다.

“저도 모르게 설이 다가오면 아이들에게 ‘고기라도 먹어야 할 텐데…’라고 은연중에 이야기하나 봐요. 그러면 아이들이 ‘엄마, 여기가 북한인 줄 아냐’며 ‘남한 생활에 얼른 익숙해지라’고 충고하곤 하죠.”

연이은 북송, 탈북 끝에 한국행 성공

화제는 김 씨 가족의 탈북으로 이어졌다. 1997년 8월 그의 큰딸이 먼저 북·중 경계선을 넘었다.

“1995년 6월 하순부터 배급이 끊어지자 당장 먹을 게 없었어요. 풀뿌리로 연명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래서 큰딸에게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밥사발을 건네주며 ‘함경북도 무산으로 가서 값어치가 나가는 골동품으로 판명난면 중국 사람에게 팔고 오라’고 했어요.”

큰딸은 물건을 팔지 못하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어떻게 해서든 먹을 것과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서자마자 인신매매범에게 붙잡혀 중국 오지로 팔려갔다.

김 씨는 큰딸이 중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딸을 찾기 위해 둘째딸과 함께 탈북했다. 남편과 12살 된 아들은 고향에 남겨 놓은 채. 그러나 그들도 인신매매의 덧에 걸리고 말았다. 김 씨는 밤새 비명을 지르며 탈출을 시도했다. 인신매매범은 그들의 정체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며칠 뒤 김 씨를 풀어줬다. 하지만 둘째딸은 이미 흑룡강성 근처로 팔려간 상태였다. 김 씨는 몇 달 간의 수소문과 조선족의 도움으로 둘째딸을 겨우 되찾을 수 있었다.

김 씨 모녀의 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1999년과 2000년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에게 붙잡혀 북송됐다. 그러나 그들은 1999년에는 북송된 지 3일 만에, 2000년에는 한 달 만에 재탈북에 성공했다.

세 번이나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김 씨의 첫 번째 탈북은 큰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두 번의 탈북은 그 이유뿐 아니라 ‘자유와 먹거리’가 추가됐다.

“중국에 다녀온 사람은 북한에서 못 살아요. 중국도 반은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북한보다 살기가 더 좋아요. 북송된 사람들은 북한 주민에게 중국에서 겪은 걸 그대로 들려줘요.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북송된 사람과 함께 탈출하죠. 한 명이 북송돼 오면 두 명이 탈출하고, 두 사람이 잡혀오면 네 사람이 두만강을 건너요.”

“탈북 6년 만에 중국에서 전 가족 감격적인 상봉”

2000년 북한을 벗어난 이후 김 씨는 큰딸을 찾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딸을 찾는 광고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로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노래방과 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2002년 2월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김 씨는 송화강 잡지에 ‘김춘애 어머님께서 큰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라는 광고를 냈다. 그해 12월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로 5년 만에 딸을 찾은 것이다.

북한을 떠난 사이 남편은 하늘나라로 갔다. 직업이 없었던 남편은 평안남도 중산의 노동교화소에 입소했다가 1년 만에 죽었다. 이후 아들은 꽃제비(아동거지)가 돼 먹을 걸 구걸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2년 11월 김 씨의 동생이 아들을 찾아 이듬해 3월 중국으로 데려왔다. 6년 만에 전 가족이 중국에 모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희망이 없었다. 계속 숨어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아이들과 함께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자유를 찾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6월 한국에 입국했다.

김 씨는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정말 천국”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에는 자유가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없어요. 여기선 열심히 일하면 북한 고위급 인사들보다 더 잘 살 수 있어요.”

“북에 있는 어머니 생각하면 가슴 아파…”

김 씨는 한국에 온 이후 직업을 구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남한 사람과 말투가 다르고, 탈북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요즘은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다.

김 씨는 남한 사회에 적응해 뿌리를 내린 아이들을 보면 대견하다고 했다. 특히 막내아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딸들은 중국에서 몇 년 정도 살아서 그런지 한국에 와서도 쉽게 자립했어요. 그런데 아들은 북한에서 바로 남한으로 넘어와서 적응을 잘 못하더군요. ‘북한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떼도 쓰고 무척 힘들어했죠. 제한된 사회에서 살다가 모든 게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오니 적응이 안 됐던 거죠. 게다다 사춘기까지 겹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 같아요. 지금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게 저보다 더 빨라요.”

아이들 자랑에 들떠 있는 김 씨의 표정에 순간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도 아이들의 어머니인 동시에 모셔야 할 어머니가 있는 딸이었던 것이다.

“북에 팔순의 어머니와 언니, 동생이 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그들이 어떻게 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먹기나 하는지…. 그들에게 남한에 있는 과일을 전부 보내주고 싶어요. 북에서는 과일 구경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는 “어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명절이나 눈, 비 내릴 때면 더 간절하게 생각난다. 그럴 땐 탈북한 친구들을 만나 마음을 달랜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