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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9월 2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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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진 2002년 10월 이후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데에만 3년이 걸린 점을 감안하면 핵 포기 이행엔 훨씬 많은 시간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어정쩡한 공동성명이 논란의 진원=북한의 주장은 공동성명에 경수로 제공과 핵 포기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는 데서 비롯됐다.
공동성명은 핵 포기의 시점은 언급하지 않은 채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이행에 대해선 ‘조속한 시일 내’라고만 규정했다. 경수로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논의’한다고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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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는 ‘조속한 시일’이 ‘적절한 시기’보다 앞선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북한의 주장이 공동성명을 위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미국이 북한과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것도 역시 모호한 공동성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기반을 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동상이몽=북한은 ‘경수로 문제 논의-경수로 제공-NPT 복귀 및 IAEA 안전조치 이행-핵 포기’의 순서로 공동성명을 이행하겠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핵 동결은 IAEA의 안전조치 이행과 맞물릴 공산이 크다.
반면 미국은 ‘핵 동결과 함께 NPT 복귀 및 IAEA 안전조치 이행-경수로 문제 논의 및 핵 포기 절차 이행-핵 포기 및 경수로 제공’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미리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론을 말하는 것”이라고 선을 확실히 그은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NPT에 복귀하고 IAEA 안전조치를 이행하면 평화적 핵 이용권을 갖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북한에 이 권리를 준다는 약속은 아니라는 의미다. 경수로는 평화적 핵 이용에 포함된 개념이다.
문제는 경수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핵 포기와 보상이라는 북핵 해법이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핵 포기 및 경수로 제공 절차는=11월 5차 6자회담에서는 어떤 핵시설을 언제부터 어떤 순서로 폐기할 것인지, 그 대가로 무슨 에너지를 어느 규모로 언제부터 제공할지, 경수로는 언제부터 논의하고 제공할지 등을 다룰 것이란 게 정부 측 설명이다.
분명한 것은 핵 폐기 이전에 핵 시설의 가동을 중단하는 핵 동결 조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 IAEA 등 국제사찰단의 감시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핵 시설 해체 작업의 어느 단계를 핵 포기로 인정하느냐도 논란이 될 수 있다.
핵 포기는 핵무기를 없애고 핵심 기능을 제거한 단계, 즉 돌이킬 수 없는 단계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핵시설의 잔해 제거까지 완료된 시점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구식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 경험이 있는 서유럽의 경우 주변 지역의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몇 년 동안 동결조치를 취한 다음 해체 작업에 들어간 적도 있다. 해체 작업만도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북-미의 이런 인식 차이에 따라, 또 앞으로의 협상 결과에 따라 경수로 논의 및 제공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몇 년의 편차가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북-미 간 줄다리기가 얼마나 치열하게 진행될지 예고하는 대목이다.
베이징=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 北 왜 하루만에 ‘先경수로’ 공세 나섰나
북한이 6자회담 합의 하루 만인 20일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선(先) 경수로 제공, 후(後)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 이행’을 주장하고 나선 이유가 뭘까.
공동성명에는 경수로 제공 문제와 북한의 NPT 복귀 등의 논의 시점이 서로 연관돼 있지 않다. 또 두 문제의 시기 자체도 모호해 형식논리상으로만 본다면 북한의 주장이 공동성명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북한의 기습적인 문제 제기는 공동성명의 허점을 정확히 파악한 데 따른 것으로, 조기에 초강수를 던져야 5개 회담 참가국을 경수로 논의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한국 등 전 세계 언론이 ‘북한의 핵 포기’에 초점을 맞춰 보도하면서 경수로 논의에 앞서 북한의 NPT 복귀 등이 선행하는 것으로 하자 이것이 기정사실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각에서는 회담 참가국들이 합의 도출에만 급급해 일부러 경수로 제공의 전제 조건을 북한 측에 정확히 인식시키지 않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또 북한 측에 ‘선 경수로 제공’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하지만 회담에 참여했던 정부 당국자들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 당국자는 “북한이 신뢰를 쌓아야만 경수로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게 분명한 원칙이다. 신뢰의 구체적인 모습인 NPT 복귀가 전제돼야 북한은 경수로를 가질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다른 고위당국자는 20일 “북한 외무성 담화는 예상했던 것”이라면서 “하지만 큰 틀의 합의가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 몇 차례 언덕과 산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공동성명 문안 논란
9·19 6자회담 공동성명에는 미국과 북한이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으로 논란을 일으킬 표현이 적지 않다. 양측의 현격한 시각차를 협상으로 뭉뚱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20일 합의문 타결 하루도 안 돼 북한이 ‘선(先) 경수로, 후(後) 핵 포기’를 주장하고 나선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모호한 표현들은 앞으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협상해 가는 과정에서 충돌 요인이 될 공산이 크다.
가장 큰 암초는 북한이 약속한 핵의 ‘포기(abandonment)’. 다시 돌이킬 수 없도록 제로 상태로 돌리는 폐기(dismantlement)와 달리 ‘포기’는 중도에 그만둔다는 의미로, 동결(freeze)로도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 원칙에 따라 폐기라는 용어를 고집했으나, 막판에 한국 측이 “꿈을 ‘포기’한다고 하지, ‘폐기’한다고 하지 않지 않느냐. 북한의 핵에 대한 꿈조차도 말살시킨다는 의미로 포기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북한도 포기라는 표현을 이렇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나아가 핵 포기 범위 역시 논란의 소지가 다분하다.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all nuclear weapons and existing nuclear programs)’을 두고 핵무기는 모두 포기하지만 핵 프로그램은 ‘현존하는’ 것에 한정하는 것으로 일단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북한으로선 ‘있지도 않은 HEU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미국으로선 앞으로 계속해서 HEU 프로그램을 추궁할 수 있는 근거라고 반박할 수 있다.
‘북-미 양국이 관계정상화 조치를 취한다’는 대목에서도 ‘서로의 양자정책에 따라(subject to their respective bilateral policies)’라고 단서를 달고 있다. 양국간 정치적 법적 차이를 염두에 둔 일반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북한의 인권신장 문제를 앞으로 양국관계 정상화의 핵심 고리로 삼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포함한 5개국이 북한에 에너지 지원을 제공할 ‘용의를 표명했다(stated their willingness)’는 표현 역시 논란을 낳을 수 있다. 이 문구는 미국의 대북 중유 지원 재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미국은 어디까지나 용의만 보였을 뿐이다. 성명의 다른 곳에서는 약속이라는 뜻의 ‘commit’ 또는 ‘undertake’를 쓰고 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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