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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월 20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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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국은 “한국의 방위는 일본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만큼 한일관계가 깨지면 한국 방위도 어렵다”고 정부를 압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통상부는 20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문세광 사건 관련 외교문서 15권 3000여 쪽 분량을 공개했다. 당시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머리에 중상을 입은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숨졌으며 기념식사를 하던 박 대통령은 연단 뒤편으로 몸을 숨겨 위기를 모면했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당시 이 사건에 대해 “북한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조종해 벌인 조직적인 범죄”라고 발표했지만 일본 정부는 “‘남한 공산주의 혁명’ 망상에 사로잡힌 문세광 본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다른 결론을 내렸다.
1974년 8월 29일자 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이번 사건은 과실 살인임에도 한국 수사 당국이 짜 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의 수사 발표에 불만을 드러냈다.
같은 해 12월 11일자 외무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조총련과 범행과의 직접 관련 증거는 포착하지 못함. 문세광의 공산주의적 혁명사상이 범행의 기초가 됐다고 판단함’이라고 한국 정부에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일본 측에 “조총련 불법화와 한국 정부 전복 활동의 금지 방침을 밝히라”고 강하게 요청했고 이에 일본 정부가 성의를 보이지 않자 양국관계는 단교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기를 맞았다.
당시 정부는 일본 측에 서한을 보내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조총련 제재 방안을 명시하는 것은 물론 사건의 충실한 수사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의회 차원의 반대와 국민 설득 등의 문제를 내세워 난색을 표명했고 이 같은 방침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9월 11일까지 조총련 제재 언급이 없을 경우 대사 소환은 물론 단교조치를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김동조(金東祚) 당시 외무부 장관은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를 요구했으나 필립 하비브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의 ‘예정된 코스’를 알지만 미국은 할 일을 다했다”며 한국 측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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