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7월 21일 19시 0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21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오른쪽 줄 가운데)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 줄 가운데) 등 참석자들이 넥타이를 매지 않고 참석한 가운데 실무적으로 진행됐다. 고이즈미 총리는 노 대통령이 연내 일본을 방문하도록 초청했다. -박경모기자
두 정상은 이날 회담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북핵 문제 외에 △남북정상회담 추진 △한일 양국간 과거사 문제 △북-일 수교 추진 등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북핵 문제, “가격을 흥정하는 단계”=두 정상은 지난달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3차 북핵 6자회담에서 구체적인 협상안이 제시됨에 따라 이제는 실질적인 협상 단계에 진입할 것이라는 데 공감을 표시했다.
노 대통령은 회담에서 “북한의 합리적인 행동을 기대하기 위해선 (국제사회의 대북) 안전보장에 대한 믿음, 개방과 개혁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며 “이제 가격을 흥정하는 단계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노 대통령은 “물건 값을 흥정할 때는 물건의 질, 수량, 가격 등을 갖고 흥정할 수 있는데 북한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물건은 다 보여준 것 같다. 속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면서 “가격 문제는 북한을 포함한 관련국이 결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은 아마 높은 가격을 기대하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두 정상은 또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6자회담의 틀을 동북아 평화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유용한 틀로 활용해 ‘동북아지역 다자간 안보협력체’로 발전시키자는 데도 의견을 같이 했다.
▽남북정상회담, “아직은 때가 아니다”=노 대통령은 회견에서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큰 행사가 아주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며 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미국의 태도가 결정적인 상황에서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한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핵 문제를 의제로 다루는 것이 북한의 입지에 도움이 될지를 면밀히 계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이 핵문제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남북관계에 대해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돼야만 의미 있는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러한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정상회담을 서두르는 것은 결코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일 과거사, “내 임기 중 꺼내지 않겠다”=노 대통령은 회견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의 예를 들며 ‘선(先)민간 차원 해법 모색, 후(後)정부 차원 해결’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안했다.
노 대통령은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의 경우에는 정부와 함께 민간학자들이 참여해 역사교육 방침에 관해 합의하고, 역사문제와 교과서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며 한일 양국 국민간 인식차가 먼저 좁혀져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선 “이전 일본 총리 시절에 일본 정부가 대체 참배시설을 만드는 것을 적극 검토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며 우회적으로 일본 정부의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김정일과의 회동 소개〓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회담에서 5월 22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내용을 노 대통령에게 상세하게 소개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당시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가 최종목적이며, 핵 관련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것은 검증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했다”며 “김 위원장은 대화에 대한 의욕이 강했다”고 전했다.
서귀포=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노타이 ‘격식파괴’… 공동발표문도 생략▼
21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회담은 물론 공동기자회견, 공식만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정이 의전과 격식을 파괴한 ‘초(超) 실무형’으로 진행됐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오후 4시15분 회담장에서 콤비 스타일의 간편한 복장과 ‘노타이’ 차림으로 만나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은 이후 일정도 모두 간편복에 노타이 차림으로 임했다.
공식 수행원 역시 한국측에서는 외교통상부장관, 주일대사,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 외교부 아태국장 등이, 일본측에서도 관방 부(副)장관, 주한대사, 외무심의관, 아시아대양주국장 등으로 최소한에 그쳤다.
통상적으로 정상회담 후에 나오는 공동성명이나 공동발표문도 없었다. 대신 두 정상은 오후 6시15분부터 30분가량 호텔 정원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일본 측 기자가 노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지의 민감한 질문을 던질 것으로 사전에 알려지면서 청와대측 수행원들은 노 대통령의 답변 수위를 놓고 잠시 구수회의를 갖는 등 고심하기도 했다.
오후 7시15분에 시작된 만찬 역시 보통 ‘존경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각하…’ 식으로 시작되는 공식만찬사 없이 노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건배를 제의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만찬 식단은 특별한 메뉴 없이 매생이 성게죽, 옥돔찜, 떡갈비구이 등 제주 특산 한정식에 포도주를 곁들여 간소하게 차려졌다.
두 정상은 22일 오전에는 1시간가량 호텔 산책로에서 함께 산책을 하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진 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실무형 셔틀 회담인 탓에 고이즈미 총리가 제주에 머문 시간은 불과 20시간밖에 안된다.
두 정상의 이번 만남은 지난해 2월 노 대통령 취임식, 같은 해 6월 노 대통령의 일본 방문, 10월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중일’ 정상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회동에 이어 5번째다.
노 대통령은 회담장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맞이하면서 “한라산 꼭대기를 볼 수 있는 날이 1년 중에 3분의 1밖에 안 되는데, 고이즈미 총리가 오신다고 해서 오늘은 하루 종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제주=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