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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6월 6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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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81년 1월 제40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외국 정상 가운데 첫 번째로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한 데서도 이 같은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 안보의 틀은 레이건 대통령-나카소네 야스히로(82∼87년) 일본 총리-전 대통령(80∼87년)으로 이어지는 한미일 3국의 ‘콘크리트 공조’가 기본 축이었다.
냉전 시절이었던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관심은 지역 내 민주화 및 인권 상황보다는 공산권을 견제하는 역내(域內) 안보 공조가 우선이었다. 특히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전 전 대통령,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재임기간의 대부분을 함께 했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한 전 전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당시 4만명 수준이던 주한미군의 ‘사실상의 철수 백지화’를 약속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전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신이 재선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하겠다고 공언해 놓은 것을 뒤집은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 공약을 확고하게 이행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을 취임 후 첫 국빈으로 초청한 것은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던 5공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식 지지로 해석돼 상당수 한국인에게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6·25전쟁 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반미정서가 일기 시작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일각에서는 전 전 대통령 국빈 초청을 두고 당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 대한 구명 차원의 성격도 담겨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83년 11월 방한해 전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비롯해 재임기간 모두 4차례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때마다 그는 ‘한국인이 원하는 한’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따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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