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방북]日 “北에 끌려다닌 굴욕적 정상회담”

  • 입력 2004년 5월 23일 18시 47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의욕적인 방북 외교에 대해 일본에서는 비판 여론이 거세다. 2002년 9월 1차 회담 때와 접대방식만 비교해 보아도 ‘홀대’임이 분명하다고 흥분하는 분위기다.

▽“굴욕적이다”=공항 도착 때 환영행사가 없었으며 영접도 지난번 국회의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급에서 외무성 차관급으로 격하됐다. 회담 장소는 국빈용으로 이용되는 백화원초대소가 아닌 대동강영빈관이었다. 새로 단장해 선보인 것이라고 하지만 관례에 비추어 어색하다는 것. 정상회담 시간도 당초 예정된 2시간보다 30분 빨리 끝났다.

회담이 끝난 뒤에는 손님인 고이즈미 총리보다 접대하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외무성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회담장에 들어서려다 북측 경호원들한테 멱살까지 잡혔다는 말도 나왔다. 취재진으로 오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북측이 해명했다지만 ‘얼마나 얕잡아 보였기에…’라는 게 일본 언론들의 논조다.

21일 평양거리에는 평소처럼 ‘대일 비난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북한에 끌려만 다녔다”=2002년 1차 회담 때 북측이 사망했다고 밝힌 8명의 가족과 북측이 납치한 적이 없거나 모른다고 부인한 2명의 가족들은 22일 밤 귀국한 고이즈미 총리를 공개적으로 몰아붙였다.

이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북한에 실리만 빼앗긴 최악의 결과” “총리에게 배신당한 느낌” “왜 나머지 피랍자 문제는 제기하지 않았는가”라며 매섭게 추궁했다. 사망 실종자에 대한 추가 정보는 얻어내지 못한 채 ‘대북 경제 제재’ 카드만 내던지고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기로 한 것은 굴욕적이라는 비판이었다.

1시간 가까이 질문 아닌 질책이 계속되는 동안 고이즈미 총리는 입을 꼭 다문 채 듣기만 했다.

▽처음 일본 땅을 밟은 자녀들=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일본에 도착한 5명의 자녀들은 부모와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하스이케 가오루(蓮池薰·46) 부부는 1년7개월 전 평양에서 헤어졌던 딸 박영화씨(22)와 아들 박기혁군(19)의 손을 잡고 23일 새벽까지 도쿄(東京)시내 호텔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본인 부모의 피를 받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아픈 과거사나 본명조차 모른 채 자라온 두 아이였다.

일본인 피랍자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48) 부부의 세 자녀 오경애(22) 오경석씨(20) 오경호군(16)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계획이 발표된 뒤 정부가 마련해 준 큰 집으로 이사하거나 일본어 교육방법을 찾아보는 등 분주한 날을 보내왔다. 당국은 이들에게 생활비 지원과 한국어가 가능한 일본어 교사를 배치하는 등 일본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준비 중이다.

▽“우리는 안 간다”=상봉의 기쁨을 나눈 이들과 달리 소가 히토미(44)의 남편과 두 딸은 오지 않았다. 주한미군 탈영병 출신인 남편 찰스 젠킨스가 처벌을 우려해 일본행을 포기한 데다 두 딸도 도리어 “어머니가 북한으로 오라”며 잔류를 원했기 때문. 이들 가족은 양국 정상 합의에 따라 조만간 중국이나 스위스 등 제3국에서 상봉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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