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5월 9일 18시 55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쇼트씨가 들려주는 가족사는 독일과 한국, 두 분단국 출신인 젊은 남녀의 사랑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61년 북한 유학생 임병룡(함남 이원군 출신)과 동독 처녀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국비유학생으로 옛 동독지역의 프라이베르크 소재 대학에서 제철공학을 공부하던 아버지를 만난 것은 60년 어느 댄스파티에서였다. 어머니는 훗날 쇼트씨에게 “지적이고 매력적인 아버지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가난한 동양인과의 교제를 반대했고 결국 나는 결혼식도 하지 않은 채 너를 가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소분쟁이 터지자 북한 당국은 귀국 지시를 내렸고 살아있으면 올해 70세인 아버지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쇼트씨가 태어난 지 4개월이 갓 지난 때였다.
보수적이던 60년대 동독의 분위기는 동양계 혼혈아를 낳은 어머니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외가로부터 외면당했고 탁아소에서 생활하면서 주말에만 친정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쇼트씨는 19세 때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보다가 아버지가 북한인임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진 뒤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일기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 슬픔 원망이 담겨 있었다고 쇼트씨는 기억했다. 66세인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아버지 생각에 잠긴다는 것.
쇼트씨는 81년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편지를 써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 보냈지만 답신을 받지 못했다. 90년대 초 독일이 통일된 후 몇 년간은 어려워진 동독 경제상황 때문에 실직과 구직을 반복하면서 아버지를 찾는 노력을 계속하지 못했다.
그는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 초청으로 입국한 뒤 6일 강연회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던 23년 전에는 동독의 여행제한 때문에, 독일이 통일된 지금은 남북한 분단 때문에 아버지에게로 갈 수가 없다”며 ‘2중 분단’의 아픔을 토로했다.
쇼트씨는 이날 이산가족 상봉신청서를 낸 뒤에는 아버지의 고향땅이 멀리 보이는 임진각을 찾았다. 그는 북녘을 가리키며 “분단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동행한 한독문화연구소 이영란(李瑩蘭) 선임연구원이 전했다.
적십자사측은 “안타깝지만 쇼트씨가 독일국적이어서 상봉행사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답했다.
대신 독일 국적인 만큼 차라리 국제적십자를 통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