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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16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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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영역에서 정치싸움은 금기=15일 유명 정보통신회사의 한 사원은 탄핵을 가결시킨 국회의원 193명의 명단과 함께 감정 섞인 욕설을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가 “회사에 좋을 게 뭐 있느냐” “괜한 싸움 걸지 마라”는 동료들의 항의를 받고 자진해서 글을 삭제했다.
회사원 김모씨(29)는 “요즘 정치색을 띠는 글을 올리는 것이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사내 게시판이 부쩍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최근 사내방송을 통해 직원들에게 “고객을 접촉하는 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구청 공무원은 “총선에 비상이 걸려 공무원들이 탄핵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을 시간조차 없다”고 말했다.
▽시민들도 일상 속으로=택시운전사 지모씨(55)는 “승객들이 처음에는 탄핵 관련 방송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제는 ‘탄핵’이라는 말만 나와도 지겹다며 라디오를 꺼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 대학원생 장모씨(24)는 “당장 해야 할 일상의 일도 많은데 탄핵에 신경 쓸 틈이 있느냐”며 “연구실 인트라넷이 있긴 하지만 탄핵 운운하는 글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탄핵안 가결의 충격으로 정치권에 대한 성토가 주말을 이용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다 점차 ‘충격→논란→진정’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총선 때 투표권 행사로 의사를 표현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한 이유로 보인다.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고모씨(31)는 “탄핵안이 가결된 후 며칠간 직장동료들끼리 논쟁이 거셌으나 이제는 논쟁보다는 투표로 의사를 표현하자는 다짐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숙해진 시민의식=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점차 시민의식이 성숙해지고 있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조대엽(趙大燁)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적 혐오나 냉소가 표출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사안에 대해 시민영역이 관여하는 방식이 한결 성숙해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은영(羅恩暎) 서강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감정적 대립을 부르는 소모적 논쟁을 피하자는 것으로 보인다”며 “감정적 대응에 앞서 사안을 신중하게 지켜보는 성숙한 문화를 형성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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