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클린턴과 미테랑을 보라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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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4년4개월 뒤에 사라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재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일로 제시된 12월 15일까지만 존재할 나라도 아니다. 재신임이 거부돼 대통령이 하야하고 차기 대통령이 선출된다 해서 소멸할 나라 또한 아니다.

▼지도자의 위기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요구로 초래된 충격 속에서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나라의 장래다. 역사의 눈으로 보면 임기 5년의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대통령으로 불과 8개월 재임하며 짊어지게 된 멍에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것도 혼자 감당하기가 버거워 국민과 나누자고 했으니 4700만명이 달려들면 아이든 노인이든 무겁다고 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를 꺼낸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지만 외국에는 그 정도의 위기를 겪은 국가원수가 여럿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고 배워 재신임 여부가 매듭지어질 때까지 혼란을 최소화하고 그 기간을 최대한 단축했으면 하는 것이 국민의 바람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당시 유례없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98년 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으로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때로는 눈물을 흘렸다. 특별수사팀의 신문을 받고 상원의 탄핵재판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클린턴은 위기에 빠지기 전에 벌어놓은 밑천이 두둑했다. 성추문의 전말이 하나하나 드러났지만 ‘대통령 클린턴’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60%를 상회했다. 클린턴은 부끄러운 지도자로서 국민 보기가 민망했지만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잊지 않았다. 자신의 위기 탈출보다 국정운영을 앞세운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다독여 평화협정을 맺게 한 사람은 탄핵위기에 빠진 클린턴이었다. 98년 중간선거에서는 집권당이 패배하는 관례를 비웃기라도 하듯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98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성추문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모두 뒤로 미루고 나라를 위해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클린턴이 다음달 한국에 온다. 노 대통령이 그를 만나 다른 얘기 할 것 없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곧 위기 탈출의 길’이라는 교훈을 들었으면 한다.

▼노 대통령 자신을 버려야▼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전립샘암이 악화돼 임기 말 7개월을 중환자로 지낸 것이다. 그가 퇴임 다음 해 사망하자 주치의는 놀라운 비밀을 공개했다. “94년 11월경부터 미테랑의 일과는 침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오전에 엘리제궁에 도착하면 즉시 침대로 갔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깐 일어났다가 또 낮잠을 잤다.”

미테랑은 누워있었으나 프랑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비결은 좌우동거 정부였다. 국정을 과감하게 우파 내각에 맡긴 것이다. 미테랑은 꼭 필요할 때는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화장을 한 뒤 대중 앞에 나섰다. 95년 3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사회개발정상회의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지막 다자회담에 참석한 미테랑의 말을 듣기 위해 각국 기자들이 회견장에 몰려들었다. 정상회의에 100여개국의 지도자가 참석했지만 기자들이 의자가 모자라 바닥에 앉아 취재를 한 것은 미테랑의 기자회견이 유일했다. 당시 회견장에는 미테랑에 대한 기자들의 존경심이 넘쳤다.

노 대통령은 이전에 벌어놓은 밑천이 별로 없다. 미테랑 시대의 좌우동거 정부 같은 든든한 파트너도 없다. 위기 탈출에만 몰두한다면 전망은 더욱 어두워진다. 국민이 국가경영을 한 사람에게 위임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노 대통령은 재신임 여부보다 ‘대통령 노릇’에 힘을 쏟아야 한다. 노 대통령이 자신을 버릴 때가 됐다.

방형남 논설위원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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