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동우/盧대통령의 언론소송 읽기

  • 입력 2003년 8월 17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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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필자의 낡은 자료철에는 ‘바보 노무현’에 관한 네티즌의 글들이 보관되어 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에서 출마했다가 떨어진 직후 노사모가 생겨날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당시 인터넷 등에는 지역감정의 벽에 온몸으로 부딪혔다가 좌절한 노무현씨를 지지하는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지금 읽어봐도 그 글들은 하나하나가 바로 ‘감동’ 그 자체일 정도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은 철옹성 같은 지역감정의 벽에 바보처럼 도전한 그의 용기와 그 실패에 대한 격려와 안쓰러움의 표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은 늘 그랬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용기와 명분만 가지고 그는 절벽 같은 기득권과 맞서곤 했다. 타협을 통한 현재의 안락보다는 고난의 원칙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더욱 투쟁심을 발휘하곤 했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투쟁과 좌절 그리고 극복으로 점철된 한편의 드라마라는 말도 듣는다.

그는 이제 ‘바보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 노무현이다. 그런 그가 지금 한판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정치 경제 남북문제 외교 노사문제 등 산적한 국정과의 싸움이 아니다. 바로 주요 비판언론과의 싸움이다. 취임 이후 줄곧 언론을 비판하고 공격해오긴 했지만 최근에는 그 양상이 심상찮다. 8월 2일 국정토론회에서는 공무원들에게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부당하게 짓밟는 언론의 횡포’에 단호히 맞설 것을 촉구하더니만 마침내 12일에는 야당의원과 4개 신문을 상대로 30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의 손배소송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공인 중의 공인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의혹제기와 비판을 문제 삼아 언론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우리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언론소송을 두고 ‘비판언론 재갈물리기’이거나 ‘피아 편가르기’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닐 것 같다. 그의 언론소송 또는 언론과의 전쟁에는 단순히 재갈물리기 이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정략적 의도가 읽혀진다.

먼저 매번 강한 상대와 싸워온 그의 승부사적 기질에서 온 공격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즉 보수성향의 주요 언론과의 싸움이 지지도 하락을 거듭하고 있는 자신에게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정략적 계산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국정 수행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희석하고 국민의 관심을 특정 방향으로 돌리려는 국면전환용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고 있는 진보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보수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의 의미가 느껴진다.

정치적인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그의 정치 역정을 감안할 때 만약 ‘바보 노무현’ 당시라면 이러한 선택은 적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첫째, 과거에는 그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 기득권이라는 골리앗과 싸우는 양심세력으로 비치는 측면이 있었고 민중의 지지도 이끌어 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가장 큰 기득권이고 누구보다도 강한 세력이라는 점이다. 둘째, 따라서 언론에 대한 그의 집요한 공격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판을 잠재우려는 정치행태로 국민에게 비치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이다. 본인은 언론으로부터 부당하게 짓밟히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지만 적지않은 국민은 오히려 대통령이 언론을 부당하게 탄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순수성과 명분을 잃은 정치적 싸움이 성공을 거둔 예는 동서고금을 통해 드물었다. 그 자신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매우 애석한 것은 이제 ‘바보 노무현’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당시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 노 대통령이 보이고 있는 행태는 안타까움 그 자체일 수 있다.

정동우 사회1부장·부국장급 fo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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