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새 취재시스템 도입]회의 공개하겠다더니 "나가달라"

  • 입력 2003년 3월 27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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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27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건설교통부 업무보고 회의장. 대표취재를 위해 들어간 풀기자 2명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모두발언도 듣지 못한 채 “그만 나가달라”는 한 직원의 요청으로 밀려나왔다.

이날 업무보고 취재는 노 대통령의 모두발언 5분으로 제한돼 있었으나 그나마도 직원의 일방적 행동으로 취재를 원천 봉쇄당한 셈이다. 청와대는 당초 각 부처 업무보고를 토론까지 완전 공개하고, TV 생중계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별다른 해명도 없이 업무보고를 완전 비공개로 진행하고 있다.

17일 법무부 업무보고 때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인사 연루의혹이 제기돼온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사건 수사에 대해 “정치적 고려를 하지 말고 수사하라”고 지시했으나 대변인실이 배포한 브리핑 자료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었다.

당시 브리핑 담당자는 ‘3대 의혹사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는 내용을 브리핑 자료 초안에 담았고,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과정에서 질문이 나오면 노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브리핑 자료를 사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은 삭제됐고, 자료만 배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홍보수석실은 나중에 기자들의 개별취재가 시작되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이를 공개했다.

청와대는 새 정부 들어 취재시스템을 개편하면서 하루 두 차례씩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을 하는 대신 비서실 출입을 완전 금지했다. 또 비서관급 이하는 기자들과의 개별접촉을 피하라는 내부지침이 내려져 청와대 내에서 공식적인 취재대상은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13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들과는 전화 연락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출입기자들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있는 정례 브리핑과 오후 3시반경 배포되는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워치콘 격상 발언’ 파문이 보여주듯 브리핑에 대한 신뢰도마저 크게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공급자 위주’인 취재시스템 때문에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아니라 ‘춘추관(기자실이 있는 건물) 출입기자’가 됐다”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문화관광부▼

14일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부 장관이 새로운 ‘홍보업무 운영방안’을 발표한 뒤 문화부 및 산하 기관에서는 기자의 취재 요청을 거부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우선 매주 수요일 실시한다고 발표했던 정례브리핑은 아직 한 차례도 실시되지 않았다.

문화부 관계자는 “기존 기자실을 브리핑룸으로 전환하는 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4월 2일부터 실국별로 홍보안을 만들어 정례 브리핑을 실시하겠다”고 해명해 사전 준비의 부족을 드러냈다.

홍보업무 운영방안은 사무실 방문 취재를 금지하고 공보관을 거쳐 취재원을 만나도록 했다. 그러나 국민일보 이광형 기자는 “27일 장관 취임 한 달을 맞아 공보관에게 장관 인터뷰를 세 차례나 요청했는데도 ‘된다, 안 된다’에 대한 응답조차 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신문의 김순기 기자도 “오보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기자와의 취재 내용을 보고하라는 ‘지침’ 이후 공무원들이 입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말했다.

또 ‘홍보 업무 운영 방안’의 ‘공무원 업무공간 보호’ 원칙이 언론 보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소장 이장열·李長烈)는 20일 유물 수장고로 쓰이고 있는 의풍각(儀豊閣)의 유물관리 실태에 문제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을 방문한 한국일보 최진한 기자에게 “장관이 공무원 업무 공간을 보호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수장고 유물은 공개할 수 없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이 소장은 또 “공개를 거부하더라고 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문제가 논란을 일으키자 문화재청은 25일 “의풍각은 비공개지역이고 유물수장고로 학술 및 보존관리 목적 외에는 공개하지 않을뿐더러 ‘특정 언론사’에만 공개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최 기자는 이에 대해 “문화부는 사전에 공문을 보내 취재 허가를 받으라고 하는데 제보를 받으면 즉시 현장을 찾아가 확인해야지, 미리 공문 보내고 며칠 뒤 허가받고 간다면 현장은 바뀌게 마련”이라며 “문화부의 ‘방안’은 발굴과 비판 보도를 원천적으로 막을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전문가 시각▼

▽정진석 교수(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기자실 폐지 문제는 오래전부터 언론계 내부에서도 논의가 돼왔던 사안이다. 그 존립의 장단점은 있다고 본다. 문제는 기자실 폐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도입할 브리핑제를 얼마나 제대로 충실하게 운영하느냐 하는 것이다.

또 기자들이 사무실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정부가 요란하게 방침으로 내세워 정할 일은 아니다. 기자들은 취재 경쟁을 벌여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사무실로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가 그동안 사무실을 출입했다고 해서 정부 업무가 과연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부분의 본질은 오히려 새 정부의 언론관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인터뷰나 취재를 하기 전에 미리 공보관실을 거치도록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는 취재의 자유와 독자의 알 권리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 새 취재시스템은 결국 언론이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취재하는 내용이 아니라 정부가 알리고 싶은 것만 브리핑하는 제도가 될 위험성이 크다.

▽성동규 교수(중앙대 신문방송학과)=기본적으로 기존의 취재 관행이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원론에는 찬성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새 취재 시스템의 각론에는 언론 자유를 침해할 요소가 있다고 본다.

기자실을 개방하고 브리핑제로 가는 것은 좋지만 청와대의 경우에서 드러났듯 브리핑을 하는 사람의 업무 파악 능력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사무실 출입제한도 문제가 있다. 일반 민원인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하면 담당 공무원을 만나 볼 수 있는데 정작 기자들은 안된다는 것은 취재와 언론 자유에 위배된다.

공보관을 통해 사전에 면담 신청을 해야 공무원들이 취재에 응하도록 한 것은 사실상 공무원들의 의사 표현의 자유 자체를 제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특수한 상황들이 잘못된 취재 환경을 낳았을 수 있지만 이는 서서히 개혁해 가야지 정부가 구체적인 지침을 갖고 진행해 나간다면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박성희 교수(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기자실을 개방하고 브리핑 제도로 나아가는 것은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단 전제가 돼야 할 점은 브리핑의 내용이 충실해야 하며 각 언론사에 공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에 공보관에게 신청한 뒤 인터뷰나 취재를 하도록 하는 것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신문사의 취재는 마감에 쫓기는 시간과의 싸움 아닌가. 더구나 공보관이 100명씩 되는 것도 아닌데 한두 명의 공보관이 현실적으로 각 언론사의 취재를 도울 수 없다.

그리고 공보관을 경유해서 취재를 하라는 것은 누가 기자와 만났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특종에 해당하는 내용을 문의해도 대답이나 확인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취재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백악관 등 해외 선진국 사례를 많이 든다. 하지만 나라마다 언론의 성격이 다르고, 정보공개를 둘러싼 문화와 룰이 다르므로 무조건 선진국 사례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언론환경에 적합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허행량 교수(세종대 신문방송학과)=기자실 제도를 개선해 브리핑제로 가는 것은 기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기자실에 모여서 기사를 작성할 때보다 기사 방향도 다양해지고 기자들이 좀 더 자기 책임하에 취재를 하게 될 것으로 본다.

사무실 출입 제한은 사회적 문화의 문제라고 본다. 미국이나 일본은 사무실을 찾아갈 때도 선약을 하고 찾아가는 일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에서는 민원인들도 선약 없이 관청을 가는 것에 익숙하다.

취재 문화도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문화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사회 시스템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따라가야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취재 응대 후 보고제도는 이번에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공보관을 통한 사전 예약제 자체가 사후 보고제와 같은 제약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취재를 사실상 봉쇄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취재의 자유가 제한되면 결국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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