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비밀송금 관계자들의 이유있는 침묵

  • 입력 2003년 2월 6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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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대북 비밀송금내역 공개 불가'를 거듭 강조하자 이번 의혹과 연루된 공직자 및 금융기관 임직원들이 일제히 입을 닫아 '진실 은폐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걸리면 죽는다'는 인식이 퍼진데다 정치권에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때문이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지금 대북 비밀송금 사건은 희생양을 찾고 있는 국면"이라며 "여기서 무슨 말이든 하면 죽는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이 대북 송금의 창구로 외환은행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김경림(金璟林) 외환은행 회장(당시 외환은행장)은 사무실을 비운 채 잠적중이다. 특히 국정원 관계자가 김 회장에게 2억달러 비밀송금에 대한 협조를 구한 것으로 보도된 뒤 김 회장은 관계 기관으로부터 빗발치는 전화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현대상선 2억달러 송금기록은 외환은행 전산망에 남아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거래기록 공개는 금융실명제법 위반이고 그런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도 실명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황학중 외환은행 부행장은 "은행원은 새가슴인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면서 외환은행과 대북비밀 송금건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대출을 총괄했던 박상배 산은 부총재는 감사원 발표 이후 사실상 잠적중이다. 박 부총재는 "나는 죄인인데 무슨 할말이 있겠느냐"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개입설을 폭로한 엄낙용 전 산은총재는 강원도 모처에 머물면서 지인을 통해 "나중에 모든 사실을 밝히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산업은행에 대한 감사 과정에서 많은 정보를 파악한 감사원은 '감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감사원 관계자들은 '대북사업을 위해 2235억원을 북한에 송금했다'는 현대상선의 해명자료를 그대로 발표했다가 언론 보도를 통해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현대상선 고위관계자는 "실상을 가장 잘 아는 정몽헌 회장이 침묵으로 일관하는데 다른 간부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얘기한다고 바뀔 것도 없는 것 아닌가"라고 침묵의 이유를 설명했다.

현대그룹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대가 현 정권의 햇볕정책을 이용했는지, 거꾸로 정부가 현대를 이용했는지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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