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野 보혁갈등, 순서가 틀렸다

  • 입력 2003년 1월 7일 18시 19분


한나라당이 대통령선거 패인을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분석하는 공식적인 자리를 가진 것은 어제 ‘당과 정치개혁을 위한 특위’ 워크숍이 처음이었다. 한나라당은 대선 후 20일 가까이 패인을 면밀히 따져보지도 않은 채 이편저편으로 갈려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면서 소일해온 셈이다.

애당초 순서가 틀린 데다 구심점마저 없으니 그동안의 개혁논의는 자연 겉돌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상황에선 결코 합당한 결론이나 건설적인 합의가 도출될 리 없지 않은가. 모두들 저마다 개혁을 외치지만, 당 내분만 심화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보혁갈등이 다시 불거진 것도 다소 혼란스럽다. 사실 한나라당의 보혁갈등이란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신한국당 시절부터 내재해 왔으나, 정권탈환이라는 공동의 목표 때문에 한동안 잠복했을 뿐이었다. 2000년 총선은 물론 작년 지방선거와 재·보선 압승이 정체성 때문이라고 할 수 없듯이, 이번 대선 패배도 정체성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보혁갈등 또한 책임논란의 변형된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정밀한 패인 규명도 거른 채 촉발된 책임논란이 진정한 당의 환골탈태(換骨奪胎)보다는 내년 4월 총선에서의 공천권을 의식한 주도권 다툼 양상으로 흐르고 있어 더욱 모양사납다. 내홍이 격화되면서 당내 세력간에 정치적 연명을 위한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 과거의 보혁갈등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보수정당이고, 그 기반 위에 이번 대선에서 46%가 넘는 지지를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민주당과 색깔이 같아지는 게 개혁은 아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개혁은 한나라당다운 색깔을 되찾기 위한 것이어야 옳다. 이번 대선은 민주당에 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서 한나라당의 변화는 시작돼야 한다.

임채청기자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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