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게 이렇군요-X 파일의 존재

  • 입력 2002년 9월 9일 16시 02분


8월 25일 밤.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일부 기자와 당직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병풍(兵風) 때문에 내일 사퇴기자회견을 한다는 데 사실이냐."

이 내용을 확인하느라 민주당 주변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소동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 처럼 느닺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전날인 8월24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한 당직자가 '극비 정보'라며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최근 병풍 공방이 심상치않자 후보 경선에서 경쟁했던 의원 들이 '이회창 이후'를 대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 민주당 내에서는 '이회창 낙마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설'의 진원지는 바로 '이회창 X-파일'의 존재라는 게 민주당 당직자들의 얘기다. 이날 소동은 이런 정보와 맞아 떨어져 빚어졌던 것이다.

흔히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말로 상징되는 상대당 후보에 대한 X-파일의 존재는 물론 민주당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한나라당내에서도 상대후보에 대한 그럴듯한 X-파일의 존재가 입에서 입으로 퍼지며 정치권 전반에 찬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 * *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도 최근 다음과 같은 '첩보'를 소개했다. "모 기관이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에게 '이회창 후보는 장남 병역 의혹과 관련해 확실한 증거가 포착돼 낙마가 불가피하다'는 터무니 없는 내용의 보고서를 전달했고, 한 대표는 8월18일 안동선(安東善) 의원의 탈당을 전후해 동요하는 의원들에게 이 보고서 내용을 말해주며 잔류를 설득했다."

민주당과 특정 기관이 합작해 이회창 X-파일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민주당 한 대표를 직접 만났다. 한 대표는 모 기관의 보고서 전달설에 대해 "말도 안된다"며 일축했다. 물론 잔류를 설득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그러나 "이 후보 병역비리의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직답을 피한 채 "이 후보의 문제는 끝까지 파헤칠 것이다. 빌라게이트가 간단치 않을 것이다. 원정출산 문제도 결국은 미래의 병역면제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병역비리의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는 작업은 현실적으로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최근 당의 요청에 따라 요로(要路)에 병역비리에 대한 확인작업을 벌였던 정대철(鄭大哲) 최고위원은 "이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판정에 관여했던 군 인사를 만나 경위를 물었으나 '모른다'고 입을 닫더라"고 털어놓았다.

민주당 병역비리 진상규명조사소위 위원장인 천용택(千容宅) 의원은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韓仁玉)씨가 병풍과 관련해 검찰에 출두하게 되면 상황이 확 달라질 것이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으로 '병역비리' 관련 X-파일이 아직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 * *

한나라당측도 상대후보에 관한 X-파일을 수집해 압박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데서는 예외가 아니다.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는 최근 몇차례 기자 간담회에서 "병풍은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정치공작이다.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이 병풍공작을 기획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당 이재오(李在五)의원도 의원총회에서 비슷한 발언을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서 대표와 이 의원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나 그의 발언은 '박지원 X-파일'의 존재를 암시한 얘기였다. 당 관계자들을 상대로 취재를 벌인 결과 한나라당이 확보했다는 '증거'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7·11 개각으로 경질된 송정호(宋正鎬) 전 법무장관의 절친한 지인이 제보해온 내용이다.

"송 전장관이 지난 3월 법무장관에 임명된 직후 박지원 실장이 불러 병풍, 세풍, 이 후보의 장남 정연씨 관련설이 돌았던 근화제약 주가 조작사건 등을 수사하라고 지시했으나 송 전 장관은 완곡하게 이를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이 제보 내용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으나, 정작 송 전 장관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박 실장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물론 박 실장도 부인했다.

뿐만 아니다. 정보통으로 알려진 한 중진의원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일가의 은닉재산에 대한 상세한 목록을 갖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현 정권을 '뇌사상태'로 만들 수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아직은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고까지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또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와 무소속 정몽준(鄭夢準) 의원에 관한 X-파일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후보의 한 특보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파일은 충분하지만 공개를 않고 있을 뿐이며, 정 의원에 대한 파일은 지금 수집단계다"고 말했다.

노 후보 파일에는 그가 참여했던 생수사업체의 '고의 부도 의혹' 등이, 정 의원과 관련해서는 출생 및 병력(病歷)과 대학재학 당시의 컨닝사건 의혹 등에 관한 자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한나라당은 이같은 정보를 주로 제보에 의해 얻는다고 말한다. 김성재(金聖在) 문화관광부장관이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2000년 1월초 군 검찰관계자를 불러 이회창 후보 등이 포함된 '추가적인 병역비리조사대상 의원 명단'이란 문서를 주면서 병무비리 수사를 지시했다는 폭로도 당시 군검찰관계자의 양심선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파괴력있는 첩보'는 정보기관과 연줄을 갖고 있는 의원들이 개인적 채널을 통해 입수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나라당측이 최근 병역비리의혹을 폭로한 김대업(金大業) 전 의무 부사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천용택 의원간의 커넥션 의혹을 제기하며 카운터 펀치를 날린 것도 당내 정보통인 정형근(鄭亨根)의원이 정보기관으로부터 입수한 첩보에 바탕한 것이었다는 후문이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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