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상봉]남북 '겨레말지킴이' 감격의 포옹

  • 입력 2000년 8월 18일 01시 13분


남과 북으로 갈라져 같은 일을 해온 사람들. 그들은 하나였다.

남과 북의 대표적 국어학자인 허웅씨(82·한글학회 이사장)와 유열씨(82), 그리고 민족 정서를 온 몸으로 노래해 온 시인 고은씨(67)와 오영재씨(64)는 17일 저녁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환송 만찬에서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허씨와 유씨는 6·25전쟁 전인 48년 한글학회 소속 연구원으로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한글 연구에 전념했던 ‘동지’였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젊은 시절 연구에 있어서는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허씨는 “남과 북이 정치적으로 화해를 시작했으니 이제 우리도 죽기 전까지 ‘국어의 통일’을 위한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했고 이에 유씨도 “언어의 이질감을 이대로 놔두면 통일의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허씨는 보도진에 “유선생은 이두(吏讀) 연구의 대가”라고 소개한 뒤 그에게 48년 유씨가 직접 작성한 ‘풀이한 훈민정음’(보신각 출간)의 사본을 건네주기도 했다. 특히 허씨가 48년 당시 유씨로부터 직접 언어학을 배웠던 김계곤 현 한글학회부회장(인천교대 명예교수)이 당시의 강의록을 복사한 A4용지 20여장 분량을 건네자 유씨는 “52년 만에 받는 제자의 노트북”이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한편 유씨는 이날 딸 인자씨(60)를 만나 최근 태어난 외증손녀의 이름을 ‘임(林)여울’로 지어주며 “자연스럽게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아름답게 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고은, 오영재 두 시인은 첫 눈에 서로의 가슴을 열어제치며 더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91년 남북 작가회담 당시 남측 대표였던 고씨는 당시 북측 대표였던 오씨를 분명히 기억했다. 고씨는 “오선생은 모국어의 절묘한 가락을 잘 구사해 온 시인”이라며 “우리는 ‘시(詩)의 혈육’으로 이어진 형제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고씨에게 술을 건넨 오씨는 “시인이 술 좋아하는 것은 남과 북이 다를 것 없다”며 “제대로 술을 마시려면 바지를 벗고 시원한 복장으로 마셔야 제 맛인데 통일이 되면 그럴 것”이라며 웃었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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