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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8월 6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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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4시경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전화’를 받은 김준섭(金俊燮·66·서울 강동구 성내동)씨는 벌써 북에 있는 동생 창협씨(62)와 경숙씨(55·여)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2일 경기파주에서 열린 국회 조찬기도회에 이산가족 대표로 참가했던 김씨는 “그때 기도했던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신 듯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형제자매가 생존한 69명중 7명은 못 갈 것이라는 소리도 들렸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이도 좀 적은 듯한 생각이 들어 걱정을 많이 했던 김씨. 부모 처 형제자매 직계가족 등 순으로 선발되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방북단에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은 5일밤엔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번 자신의 뺨을 꼬집어도 봤으며 마음이 들떠 오전2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가 가족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50년 7월9일 자신이 평양 제10중학교를 졸업하던 졸업식날.
“졸업식장에 인민군들이 예고도 없이 들어와 학생들을 마구 징집하더라고요.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일터와 교회에 가느라고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아침에 집에서 축하를 해주었는데 부모님과 5명의 동생들과는 그것이 영영 이별이 됐죠.”
이후 반공포로로 풀려나 남한에 정착하고 산지도 어언 47년. 그동안 새 자동차를 공장에서 각 지역으로 운반해주는 일을 해온 김씨는 딸만 2명을 두었으나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은 아내와 살고 있다. 웬만큼 생활기반이 잡히면서 그는 단 하루도 북에 두고온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김씨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통해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번 이산가족 방북단 선정과정은 정말 기쁨과 슬픔이 교차된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산가족 방북단 200여명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없이 기뻤지만 곧 부모님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눈물이 하늘을 가렸다는 김씨. 100명의 방북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은 기쁘지만 동생 창협씨와 경숙씨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앞선다.“동생들에게 선물로 뭘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곧 통일이 될 거니까 남한돈이라도 좀 줘야겠죠?”라며 기자에게 동생선물을 물어보는 김씨의 마음은 평양시 감흥리의 고향 기와집에 이미 도착해 있는 듯했다.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