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東西獨통일 어떻게 진행됐나

  • 입력 2000년 4월 10일 23시 40분


남북정상회담에 원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선례로 1970, 80년대 동서독간에 진행된 몇차례 정상회담이 있다.

동서독 정상들은 분단상황 하에서 양국관계 정상화와 경제협력 등 실질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70년 이후 90년 12월 통일직전까지 공식회담 6차례, 비공식 접촉 3차례 등 모두 9번 마주 앉았다. 이 가운데 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와 동독의 빌리 슈토프 총리 간에 두차례 연이어 열린 회담은 성사 과정 및 성과 면에서 의미가 특히 크다.

69년 10월 동방정책의 개척자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양독(兩獨)관계를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협상을 제의했다. 같은 해 울브리히트 동독국가수반이 ‘동서독간 동등한 관계수립을 골자로 한 국가조약협상’을 위한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하이네만 서독대통령이 이를 즉각 수락함으로써 앙측은 절차 논의에 들어갔다.

회담 자체에 대한 합의는 쉽게 이루어졌지만 회담에 임하는 양측 입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동독은 기존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이를 법률적으로 보장받겠다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서독은 양측의 교류를 통한 상호접근을 지향했다.

이러한 양측의 입장차이는 정상회담의 절차논의에서부터 마지막 회담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70년대 3월초 네차례 열린 실무접촉에서는 회담장소가 걸림돌로 등장했다. 서독은 분단 전 수도였던 베를린의 상징적 의미를 고려해 동베를린에서 첫 회담을 해야 한다면서 서베를린을 통해 동베를린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동독 측은 서베를린이 국제법상 결코 서독에 속한 곳이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동서독 국경에서 70km 떨어진 에르푸르트가 회담장소로 결정됐다.

3월 19일 오전 양측 총리가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하자 수천명의 동독주민들은 “빌리 빌리”(양측 총리의 이름)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회담장 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동독의 슈토프총리는 △국제법상 동등한 동서독관계 수립 △할슈타인원칙의 명백한 포기 △동시 유엔가입 신청 △군비 50%감축 등 7개항을 제시하며 “동독이 독자적인 주권국가로서 제한없이 국제적 인정을 받기 원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반해 서독 측은 △양 국가는 서로 외국인이 아니며 △선린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등의 6개항을 제시했다. 브란트 서독총리는 동서독이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이를 법률적 실체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다만 “한편이 다른 한편을 대외적으로 대표할 수 없다”는 ‘단독대표권포기’입장만 밝혔다.

두달 후인 5월 21일 열린 회담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계속됐다. 동독측은 서독이 법률상의 ‘내국(內國)’개념을 동독지역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법률적 침략’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서독은 ‘내독간(內獨間) 경제교류의 면세혜택’ 등 현실적인 면을 들어 반박했다.

두 정상은 결국 다음 만날 약속도 정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상회담은 실패였다. 그러나 이 첫 만남을 토대로 양측은 꾸준히 대화를 계속했다. 결국 △71년 9월 우편 및 통신교류 △12월 서독-서베를린간 통행협정 등을 거쳐 72년 11월 8일 통독 이전 가장 중요한 문건으로 꼽히는 ‘기본조약’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구자룡기자>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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