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씨 국민신당行 배경]『한나라당선 미래없다』판단

  • 입력 1997년 12월 8일 20시 05분


박찬종(朴燦鍾)한나라당고문이 8일 장고(長考)끝에 국민신당에 합류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리자 그동안 「박찬종 모시기」에 열을 올려온 한나라당 국민회의 국민신당 등 주요 3당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가장 고무된 쪽은 말할 것도 없이 이인제(李仁濟)국민신당후보 진영이다. 이후보 진영은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이제 승기(勝機)를 잡았다』며 기뻐했다. 국민회의도 상당히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 즉각 『「특권층의 고귀한 의무」를 외면한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후보는 군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박고문의 소신은 정당하다』며 박고문을 극찬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독불장군식 정치행태를 재연해 국민들, 특히 부산시민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며 박고문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집요하게 박고문에게 동참해줄 것을 간청했다. 또 박고문의 결단 직전까지 서울시장후보공천과 총재양보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끝내 박고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동안 박고문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 장고를 거듭했다. 「03 마스코트」 사건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사퇴하고 칩거에 들어간 지난달 초에는 국민신당행을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신당지원설이 터져나와 이인제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부산지역 민주계의원들이 눌러앉자 박고문의 마음도 약해졌다. 하지만 민정계 민주계에다 민주당과의 합당 등 복잡한 상황속에서 당내 입지가 마땅치 않다는 게 박고문의 고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제후보가 1일의 1차 TV토론 이후 지지율 회복세를 보이자 박고문의 마음은 다시 국민신당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고문 나름대로의 셈법도 작용한 것 같다. 이인제후보의 당락과 관계없이 대선 이후 PK(부산 경남)지역의 「맹주」를 겨냥했을 가능성육3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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