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후보」만든 사람들]황우려의원등「8人회의」터닦기

  • 입력 1997년 7월 22일 08시 09분


신한국당 李會昌(이회창)후보의 세력확산 작업은 「정지(整地)→세(勢)결집→대세굳히기」의 3단계로 나뉘어진다. 정지 단계는 지난해 1월 이후보가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 정치인으로 뿌리를 내리는 시기다. 이때는 이른바 「8인회의」가 주력이었다. 8인회의는 이후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의 이회창변호사 사무실에서 정기회의를 가진 멤버들. 「이회창대통령후보」를 만든 「원훈(元勳)공신」에 해당한다. 黃祐呂(황우려)의원 黃榮夏(황영하)전총무처장관 李興柱(이흥주)전국무총리비서실장 陳永(진영) 安東壹(안동일)변호사 陳京鐸(진경탁)전의원 柳瓊賢(유경현)전평통사무총장 房錫炫(방석현)서울대교수가 그들. 황의원은 감사원감사위원으로 이회창감사원장을 보좌한 뒤 이후보가 입당하면서 유일하게 전국구의원으로 데려온 케이스. 이 때문에 측근들 사이에서도 「황실세」로 불린다. 황전장관은 감사원사무총장으로 이후보를 보필한 뒤 이회창국무총리 시절 총무처장관을 지냈으며 이회창캠프의 내부 살림을 총괄해 왔다. 이전실장은 이회창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을 역임한 뒤 이후보가 총리에서 물러날 때 함께 사표를 던졌다. 이후보의 경기고 서울대 법대 후배인 진변호사는 정책팀을 이끌어왔고 진전의원과 유전총장은 조직 확산의 주역을 담당했다. 지난해 4월 이후보의 의원보좌관으로 합류한 장다사로씨는 이후보를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일정을 관리하고 있다. 세 결집 단계는 이후보의 원내세력이 자리를 잡는 시기. 지난해말을 기점으로 徐相穆(서상목) 白南治(백남치) 河舜鳳(하순봉) 邊精一(변정일) 金榮馹(김영일) 朴成範(박성범)의원 등이 속속 합류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이후보의 원내세력이 구축되면서 「대망(大望)」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高興吉(고흥길)씨가 이후보의 비서실장으로 영입되면서 언론인 출신의 합류도 줄을 이었다. 연합통신 부장출신인 具凡會(구범회), 세계일보 부장출신인 尹昶重(윤창중)씨는 경선대책위 부대변인으로 활약했고 한겨레신문 차장출신인 李炳孝(이병효), 중앙일보 차장출신인 閔國泓(민국홍)씨는 각각 의원보좌관과 인터뷰담당을 맡았다. 대세굳히기 단계는 지난 3월 이후보가 대표위원을 맡으면서 하루가 다르게 세가 불어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梁正圭(양정규) 姜在涉(강재섭) 尹源重(윤원중)의원 같은 金潤煥(김윤환)고문 계의 활약이 돋보였다. 김고문은 이 시기 이전부터 이후보와 긴밀하게 전략 숙의를 하며 대처해 왔고 이후보가 적지 않게 의지했던 말그대로 「고문」 역할을 했다. 측근들은 『이후보의 용병술은 각 단계마다 새로운 사람을 중용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밖에 막후 지원 참모로는 정책개발역인 許卿會(허경회) 朴世勳(박세훈)박사, 연설문 작성을 맡은 金東銑(김동선)전시사저널편집장 등이 있다. 지난해 7월19일 구성된 「국회의원 이회창 후원회」도 든든한 지원그룹이다. 발기인 18명 가운데는 丁渽錫(정재석 후원회장)전경제부총리 金斗喜(김두희)전법무 尹東潤(윤동윤)전체신 金始中(김시중)전과기 李忠吉(이충길)전보훈 黃吉秀(황길수)전법제처장관 등 쟁쟁한 인사가 많다. 〈박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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