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기국회에서의 노동법 날치기처리와 그로 인해 빚어졌던 혼란은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패거리정치」의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당시 신한국당 의원들은 새벽에 버스를 타고 의사당으로 몰래 들어가 처리과정의 적법성 여부는 물론 법안 내용도 정확히 모른채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대쪽」으로 불리던 당시 李會昌(이회창)상임고문조차 날치기 통과된 개정 노동법에서 복수노조 허용조항이 삭제된 사실을 몰랐다.
그 결과 온 나라가 개정 노동법의 무효화를 둘러싸고 몇달동안 소용돌이쳤고 노동법은 결국 재개정됐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정치적 소신이나 이념, 정책에 따라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기보다는 보스의 뜻에 맹종하는 현실은 여야에 큰 차이가 없다. 지금도 신한국당은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9룡들에 대한 맹목적인 줄서기가 한창이다.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누가 집권 가능성이 높으냐에 따라 보스를 선택한다. 이때문에 이리저리 눈치만 보는 「지하철계보」도 생겼다.
국민회의에서 국민 경선제를 제안했던 金槿泰(김근태)부총재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상 당내 민주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무회의에서 이를 제안하자마자 주류측이 벌떼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정상적인 토론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공천때마다 능력보다는 보스에 대한 충성도를 그 기준으로 삼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계파의 보스들마다 서로 「자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인다. 이는 돈으로 사람을 관리하는 관행과 맞물려 갖가지 부작용을 낳는다.
국민회의 金相賢(김상현)지도위의장은 최근 대선후보 경선포기를 선언하면서 그 일부를 공개해 화제가 됐다.
『4.11 총선때 1백67명의 원외 후보에게 적게는 1백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씩 줬다. 지방선거때는 광역단체장 후보들에게 수천만원에서 1억원씩, 기초단체장 후보들에겐 50만원 이상씩을 줬다』
그러나 이런 「패거리」현상이 정치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관료집단이나 기업 군대 대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연 학연 혈연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은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우선 우리의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을 승화시키는데 실패했다는 데에서 구조적인 연원을 찾고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조직이건 분파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장점이 적지 않은 공동체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해 붕당(朋黨) 도당(徒黨) 수준의 왜곡된 집단의식으로 전락시켰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정치인의 소명의식 부재가 겹쳐 정치의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가기보다는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고 현실야합적인 정치인들의 자세가 주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서울대 韓相震(한상진·사회학과)교수는 『정권이든 기업이든 대부분의 조직내에서 힘의 소수집중화가 심하다는 점이 이런 보스중심의 패거리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힘의 과잉집중이 내부의 다양성을 억제, 당내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등 서구 선진국에도 계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외교 복지 등 정책을 매개로 형성되고 가동된다. 또 이념상 진보냐, 보수냐, 중도냐에 따라 세력이 결집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토론과 타협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보스의 결정을 무조건 추종하는 우리의 파벌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패거리정치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은 당내 민주화다. 정당마다 내부의 이론(異論)을 인정하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한다는 것.
건국대 韓貞一(한정일·행정학과)교수는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의 토론문화정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교수는 또 『지난 92년 대통령선거때 金泳三(김영삼)후보가 거부했던 후보간 TV토론이 이뤄졌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앙대 金玟河(김민하)총장은 『15대 국회가 출범한지 1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국회해산론까지 나오는 현실에 대해 정치인들이 대오각성해야 한다』며 『정치인들이 헌법기관으로서의 책임감을 되찾는 것이 패거리 정치를 청산하는 전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