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7년 6월29일 당시 盧泰愚(노태우)민정당대통령후보가 「나의 구상」이라며 발표했던 6.29선언은 전적으로 全斗煥(전두환)전대통령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노씨는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전씨와의 사전상의없이 내린 「고뇌의 결단」이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사실은 전씨가 당시 「6.10항쟁」 등으로 표출된 국민의 직선제 등 민주화요구를 도저히 묵살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직선제수용과 金大中(김대중)씨 사면 등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구상, 이를 노씨의 「작품」인양 꾸며 발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본사가 단독입수한 전씨의 부인 李順子(이순자)씨의 회고록 초안에서 밝혀졌다.
이씨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이 먼저 직선제수용을 남편인 전씨에게 건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87년6월13일 밤 전씨에게 『직선제엔 결함이 많지만 사람들은 그걸 원해요』라며 직선제 수용을 간절하게 호소하자 전씨는 『어제 朴英秀(박영수)비서실장도 당신과 똑같은 말을 합디다』라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전씨는 『직선제 후유증 때문에 신념을 갖고 반대해왔지만 국민이 원한다는 것을 안 이상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오』라며 처음으로 직선제 수용의사를 피력하면서 당시 자신의 심경을 「필생즉사(必生卽死)요,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고 말했다는 것.
이씨가 이어 『(당시 정치피규제자로 가택연금상태였던) 김대중씨도 풀어주실 건가요』라고 묻자 전씨는 『물론 그럴 생각이오』라며 거침없이 대답했다는 것.
그후 전씨는 87년6월17일 오전 10시경 청와대 집무실로 노씨를 불러 『국민의 뜻이 직선제라면 이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며 직선제 수용의사를 피력했으나 노씨는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겠다』며 일언지하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전씨는 그 자리에서 현행 헌법(간선제)으로 선거에 승리해도 노씨 집권 후 89년의 개헌논의는 불가피하게 된다는 등의 다섯가지 이유를 들며 장시간에 걸쳐 집요하게 노씨를 설득했으나 노씨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계속 머뭇거렸다는 것.
그로부터 이틀뒤인 6월19일 노씨는 전씨와 함께 만찬을 갖는 자리에서 마침내 직선제 수용 등 전씨의 민주화구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는 것.
이에 따라 전씨는 6월22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당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을 노씨로부터 보고받는 것처럼 꾸며 『노대표에게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이후 개헌논의가 재개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전씨는 6.29선언이 노씨의 작품임을 연출하기 위해 6월22일 이후 노씨의 청와대출입을 금지하는 「금족령」을 내리기도 했다고 이씨는 회고록에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노씨는 6월29일 민정당중앙집행위에서 전씨가 마련한 각본대로 떨리는 목소리로 「6.29선언」을 자신의 구상인양 꾸며 발표했다고 이씨는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崔英勳·金正勳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