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총리해보니… 행정의 9할은 소통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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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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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前총리 회고록 12월 출간
“5·17-명동성당 사태-수서사건때 청와대 방침에 세차례 항거”

“고 장관, 해방구가 뭔지 알아요?”(전두환 대통령)

“네, 러시아 공산혁명 때 나온 말로 알고….”(고건 내무부 장관)

“아니, 만날 회의만 하면서 물이나 마시고 말이야.”(전 대통령)

1987년 6월 12일 청와대 안가에서 열린 공안장관회의 도중 전두환 전 대통령이 명동성당 전투경찰 투입에 반대하는 고건 전 국무총리(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의를 달지 말고 빨리 결론을 내라는 메시지를 직접 전달한 것이었다.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분노한 민심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당시 회의는 6월 10일 명동성당으로 들어간 시위대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언제 전투경찰을 투입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고 전 총리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신부·수녀들이 연좌시위에 나서거나 △올림픽이 무산될 수 있고 △바티칸에서 한국제품 불매운동을 펼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폈다. 긴 회의가 이어졌고 결국 전 전 대통령은 다음 날 강제 진압하겠다는 뜻을 굽히고 만다.

“그때 명동성당에 전경 병력을 투입했었다면 6·29선언이 나올 수 있었을까. 88올림픽은 열릴 수 있었을까.”

고 전 총리는 12월 5일 출간 예정인 자신의 회고록 ‘국정은 소통이더라’(사진)에 이 같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두 번의 국무총리, 두 번의 서울시장, 세 번의 장관을 거친 만큼 그는 역사의 물줄기를 가르는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이 경험을 토대로 그는 “공인은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서도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행정의 9할은 대화와 소통이다” 등의 결론을 내놓았다.

고 전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라면 임명권자의 지시나 청와대의 방침에 따르는 것이 상례다. 나는 그 원칙을 따르려 노력했다”면서도 “5·17, 명동성당 사태, 그리고 수서사건 때 세 번 청와대에 항거했다”고 회고했다. 1980년 5월 17일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있던 그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앞두고 사표를 썼다. 또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12월에는 수서지구 특별 분양을 계속 반대하다 서울시장에서 경질됐다.

‘세 번의 항거’에 들어가진 않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 구속의 계기를 만든 것도 그였다. 고 전 총리는 1997년 3월 총리에 임명된 직후 김 전 대통령을 만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교체를 건의했다. 심재륜 당시 인천지검장이 중수부장에 임명됐고 심 중수부장은 두 달 뒤 ‘한보 비리’ 사건으로 현철 씨를 구속했다.

고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언급했다. 1972년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이었던 그는 산림녹화사업에 긴급 투입됐다. 또 경주-울산 경계의 동대본산 녹화에 성공한 뒤에는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만들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새마을운동 깃발이 당시 내무부 사무관의 공모 작품이라는 비화도 공개했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 노 전 대통령의 반응, 탄핵에서 복귀한 노 전 대통령의 각료 제청 요구를 자신이 거부한 뒷얘기 등도 생생히 담았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고건#국정은 소통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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