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통역관 “60년 익힌 영어 나라 위해 써야 의미있지”

  • 동아일보

■BBB코리아서 7년째 봉사 81세 박영철 할아버지

7년째 영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는 박영철 옹이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7년째 영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는 박영철 옹이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흰색 야구모자 사이로 보이는 백발, 검버섯 핀 얼굴과 돋보기안경….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인 박영철 씨(81)는 지난달 29일 낮 서울 송파구의 자택 인근 카페 앞을 지나다 안에 있는 외국인들을 보더니 곧바로 다가갔다. 그러곤 유창한 영어를 쏟아냈다. “대화가 안 통하면 언제든 전화해요. 새벽이라도 괜찮아요. 1588-5644, 꼭 기억해둬요!”

박 씨는 통역자원봉사단체인 ‘BBB코리아’에서 2006년부터 7년째 영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BBB코리아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휴대전화를 이용해 외국인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 통역은 물론이고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전화 통역 업무도 맡고 있다. 봉사자가 4000여 명에 이르는 이 단체는 설립 10주년을 맞아 9월부터는 해외에 진출해 베트남과 라오스 대학생 200여 명에게 BBB코리아가 세운 현지 한글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도 갖고 있다.

박 씨는 지난해 7월부터는 봉사자 중에서 열의가 가장 높은 310명을 뽑아 임명한 인천공항 특임 봉사단에도 선발돼 공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전화로 해결해주고 있다.

최근 박 씨에게 전화를 걸어온 한 흑인이 대표적인 사례. 그는 국적을 밝히지 않은 채 박 씨에게 “인천공항 내 가게에서 카드를 받지 않는다. 인종 차별을 당했다.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며 화를 냈다. 알고 보니 그 외국인이 들고 있던 카드는 해외에서 사용할 수 없는 종류였지만 가게 직원이 이를 영어로 설명하지 못해 오해가 생겼다. 외국인은 박 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사소한 오해까지 풀어주는 한국은 친절한 나라”라고 말하며 출국했다. 박 씨는 “영어로 대화가 되지 않아 생긴 갖가지 오해를 전화 한 통으로 셀 수 없이 많이 해결했다”며 “‘한국은 나쁜 나라’라는 이미지를 안고 돌아갈 수도 있었던 외국인이 전화 한 통에 ‘코리아 넘버원’이라고 칭찬하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박 씨는 1946년 고향인 광주에서 미군 차를 얻어 탔다가 한 미군 옆에서 유창하게 영어로 통역하던 한국인의 모습에 반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광주에 있던 미군에게 매일 말을 걸고 미군부대에서 살다시피 하며 친분을 쌓은 뒤 미군에게 무료로 영어 과외를 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그는 1954년 6·25전쟁 복구 활동에 나선 유엔 산하 한국민사원조처와 미군 산하 민간원조처에서 모든 업무를 영어로 처리하며 17년간 일했다.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국내 신문에 난 기사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33년간 한 뒤 2004년 퇴임했다.

50년간 충분히 일해 쉬어도 될 법했지만 “50년 넘게 쌓아온 지식을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는 BBB코리아의 봉사자 모집 광고를 보고 “신났다”고 한다. 지식을 나눌 딱 맞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언제 전화가 걸려올지 모르는 탓에 그는 항상 휴대전화를 벨소리 모드로 설정해 놓는다. 오전 2, 3시 커다란 벨소리의 통역 요청 전화가 오는 바람에 잠에서 깨 통역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는 행복하다.

“나이 든 사람이 오해로 가득한 외국인의 마음을 풀어주고 대한민국이 친절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할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에요. 말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영어 통역 봉사#박영철#BBB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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