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도 비싼 음식 돼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 Array
  • 입력 2011년 10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 ‘방랑식객’ 자연요리연구가 임지호 씨

자연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 씨는 20일 “오늘 먹을 때는 몰랐는데 하루가 지난 후에 감동이 밀려오는 맛이 최고의 경지”라며 “한식을 ‘귀한 음식’으로 만들어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씨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산당 임지호의 요리연구소’ 계단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자연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 씨는 20일 “오늘 먹을 때는 몰랐는데 하루가 지난 후에 감동이 밀려오는 맛이 최고의 경지”라며 “한식을 ‘귀한 음식’으로 만들어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씨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산당 임지호의 요리연구소’ 계단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평일 오후의 주방은 가동을 잠시 멈춘 공장이다. 화력이 셀 것 같은 조리대에선 누룽지가 끓고 있고 음식 재료들은 한구석에 잘 정돈돼 있다. 흰 요리사 복장을 한 직원들은 한데 모여 늦은 점심을 먹으며 저녁 근무를 준비하고 있었다.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산당 임지호의 요리연구소’ 주방 풍경이다. 자연요리연구가 임지호 씨(55)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다 기자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세상에 선보인 적이 없는 순수 창작요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임 씨의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화상 자국이며 이런저런 흉터가 남아 있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음식 재료를 채취한 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맨 밑바닥부터 요리를 배운 손이다. 팔뚝은 단단하고 손가락 뼈마디가 굵다.

하지만 손놀림은 빠르고 정교했다. 무거운 칼로 어란의 포를 뜰 때는 한없이 섬세했고, 생선초밥을 빚을 땐 딱 필요한 만큼만 밥알을 떼어냈다. 물고기 모양을 한 10여 개의 초밥에 눈을 만든다고 좁쌀만 한 산초 열매를 두 개씩 붙이는 데 10여 초면 충분했다. 접시에 가을 장식을 할 때는 코스모스를 얹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벌레 먹은 담쟁이 잎으로 바꿔 놓는다. 그렇게 해서 3점의 화려한 작품이 탄생했다. 주방은 공장이 아니라 화가의 아틀리에였다.

임 씨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에선 집 주변의 온갖 재료를 써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부각됐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 만든 그 요리들은 소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식당에서 만난 그의 요리는 화려하다. 요리 하나하나에 스토리가 들어 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다름 아닌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그 힘은 열두 살 때 가출을 해서 온갖 방황을 하며 체득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왜 집을 나갔나.

“그저 집 밖의 세상이 궁금했다. 미지(未知)에 대한 동경이라고나 할까. 사실 여덟 살 때 처음 집을 몰래 나와 외갓집에 간 적이 있다. 2대 독자라 나를 찾느라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소년 임지호는 기차와 배를 몰래 얻어 타고 제주도까지 갔다. 원래는 일본에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식당 쓰레기통에 숨어 있다가 연탄재를 맞았고, 그 인연으로 처음 요리와 만났다.

―제주도 생활은 어땠나.

“아귀탕을 파는 집에서 심부름하고, 청소하고, 배달도 했다. 월급은 따로 안 받았던 것 같다. 제주시 건입동 부둣가였는데 얼마 전에 가봤더니 식당은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했다. 제주도에선 1년 좀 넘게 있었다. 태풍이 불어 배가 끊기고, 뭍으로 나갈 길이 단절되면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더 커지더라. 그런 시절을 겪으면서 겸손함, 겸허함, 그리움, 슬픔에서 싹트는 사랑 같은 걸 배웠다.”

임 씨는 이후 전국의 중식당과 한식당, 분식집까지 전전하며 식당 일을 배웠다. 어린 시절 한의학을 하던 부친에게 배운 지식 덕분에 그의 요리는 몸에 보탬이 되는 ‘자연요리’로 승화될 수 있었다. 해외 한식 페스티벌 등을 통해서 진가를 인정받았고, 최근 방송을 타면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졌다.

경기 양평의 ‘산당’에 이어 지난해 말 강남구 청담동에 두 번째 식당을 열었다. 음식값이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싸다. 1인분에 22만 원짜리 코스 요리도 있다(메뉴판엔 ‘2인 이상 주문 가능’이라고 돼 있다). 방송에선 베풂, 나눔, 이런 이미지가 강했는데….

음식값이 비싸다고 하자 청담동의 한 달 임차료가 2000만 원이 넘는다고만 대답했다. 그러면서 “평생 돈을 벌려고 애써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청담동을 고집한 건 이유가 있다. 이곳 식당은 비즈니스를 세계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출발점 같은 곳이다. 현재 두 곳의 식당에 직원이 30여 명 있는데 이를 3000명까지 늘리고 우리 젊은이들을 세계적인 스타 셰프로 많이 만들겠다는 포부다. 해외 진출과 관련해선 이미 해외 7성급 호텔 관계자까지 찾아와 논의하는 등 프로젝트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무조건 성공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다만 가장 중요한 점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해외에서 레스토랑을 하면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가.

“현지 재료를 우리 식으로 요리하는 거다. 양이 많아도 흉이 될 때가 있다. 양을 많이 차리는 건 스스로 값싸게 만드는 일이다. 이제 한식도 ‘비싼 음식’으로 포지셔닝해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짠맛이나 마늘 냄새처럼 외국인들이 피하는 건 삼가야 한다. 짠 것을 싫어하는데 몸에 좋은 천일염을 쓴다고 홍보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양오행 등 동양철학을 가미해 한식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식을 비싸게 포지셔닝하려면….

“품격을 갖춰야 한다. ‘재료는 신이 만들고, 양념은 악마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양념이 지나치면 재료가 묻힌다. 중용을 지키되 본재료를 돋보이게 써야 한다. 불을 너무 세게 해도 안 된다. 꼭 필요한 만큼만 재료에서 우러나오게 해야 한다. 멸치국물을 낼 때도 물을 푹푹 끓이면 상스러운 맛이 나온다. 은근하게 오래 끓여야 품격이 있는 맛이 된다. 명품은 심플하고, 정갈하고, 섬세해야 한다. 만들 때도 그런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게 말로 하는 건 쉬운데 실제로 하면 어렵다.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그는 한식 세계화 대신 ‘프렌드십’이라는 단어를 썼다.

“한식을 정말 귀하게 만들어야 세계화가 된다. 손맛이니 마음을 담느니 얘기하는데 그걸로 안 된다. 손으로 안 하고, 마음을 안 담는 음식이 어디 있나. 외국인과 정말 ‘친구’가 돼야 한다. 김치를 좋아하는 미국인이 있었는데 땀을 흘리면 냄새가 난다고 다른 사람들이 피하자 김치를 끊었다고 했다. 한식은 먹고 나면 향기가 난다는 인식을 줘야 한다. 김치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마늘을 빼고 과일을 넣는다거나 하는 실험을 이미 하고 있다.”

최근 나온 ‘방랑식객’이라는 책에는 임 씨가 한겨울에 맛본 백두산 천지의 물맛이 ‘무미(無味)’이며, 맛의 최고의 경지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맛을 내는 요리사가 무미를 추구한다니….

―도대체 무미라는 게 무엇인가.

“무미는 그림으로 치면 파란 바탕에 황금색과 은색 사각형이 있는 이미지다. 반듯한 영혼과 육체의 철학이다. (여전히 알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을 짓자) 오늘 먹을 때는 몰랐는데 하루가 지난 후에 감동이 밀려오는 경지를 말한다.”

50대 중반이지만 그는 손녀가 둘 있는 할아버지다. 큰아들 윤현 씨(28)가 일찍 결혼했다. 가족 얘기를 꺼내자 미안함, 그러면서도 자랑스러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표정이다. 오랜 방랑을 하면서 가족을 챙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윤현 씨도 요리사다. 아들은 대학에서 요리를 정식으로 배웠다.

눈과 입과 귀가 행복했던 인터뷰는 그가 갈 곳이 있다고 해서 끝났다. 종로의 한 한옥 집을 보러 간다고 했다. 윤현 씨가 그곳에 조만간 조그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낼 예정이다. 한식 명장의 아들이 만드는 피자와 스파게티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졌다.
▼ 인터뷰 때 즉석에서 만든 창작요리 3가지 ▼

《임지호 씨가 요리를 만드는 장면은 그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 같았다. 요리는 화려했고, 각각 나름의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요리는 하나하나가 재료 선택과 구성, 색의 배합을 고려해 만든 작품이었다. 임 씨가 요리를 하는 내내 직원들이 지켜봤다. 요리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아하” 하는 식의 감탄사가 나왔다. 그는 본보 인터뷰를 위해 3가지 창작 요리를 내놓았는데 직원들도 모두 처음 본다고 했다. 임 씨는 요리를 하면서 전혀 맛을 보지 않았다. 그는 “경지에 오르면 맛을 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게 된다”고 말했다. 몰입을 하면 맛을 보지 않아도 제대로 된 맛에 근접해 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음계 표현

임지호 씨가 개불과 고구마로 만든 ‘음표’ 위에 칡과 도라지를 고아 만든 검은 소스로 ‘오선지’를 그리고 있다.
임지호 씨가 개불과 고구마로 만든 ‘음표’ 위에 칡과 도라지를 고아 만든 검은 소스로 ‘오선지’를 그리고 있다.
①음표=개불 간 것과 고구마를 함께 버무린 것을 원통 모양으로 빚는다. 6개를 적당한 간격과 높낮이로 흰 타일 접시에 얹었다. 그 위해 정사각형으로 자른 두부 조각과 파를 올리고 검은색 소스로 오선지를 그렸다. 검은색 소스는 도라지와 칡을 오랫동안 고아 만들었다. 임 씨는 ‘둥둥두둥’ 하고 입으로 리듬을 타며 “우리 전통 음계를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쌉쌀한 개불과 달착지근한 고구마, 쓴 향이 나는 소스가 어울려 독특한 맛이 난다.

한폭의 동양화 보는 듯

먹이를 먹기 위해 몰려든 물고기떼를 표현한 ‘운집’.
먹이를 먹기 위해 몰려든 물고기떼
를 표현한 ‘운집’.
②운집(雲集)=초밥에 생선회를 길게 잘라 얹어 물고기처럼 만든 뒤 눈 부분에 노란 유자소스를 떨어뜨리고 산초씨앗으로 눈동자를 붙였다. 푸른 원형 접시의 중앙에 두리안 간 것을 조금씩 덩이지게 흘려 놓는다. 이후 초밥 물고기들을 어울리게 배치했다. 연못에서 먹이를 먹기 위해 몰려든 물고기들을 표현했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두리안과 초밥, 산초의 배합이 신선하다.

가을 향이 입안에 가득

벌레 먹은 잎으로 장식한 ‘천지인’.
벌레 먹은 잎으로 장식한 ‘천지인’.
③천지인(天地人)=민어알로 만든 어란을 얇게 뜬 뒤 두부와 함께 갈아 소스를 만든다. 싸리버섯을 들기름으로 볶은 것을 세 개의 그릇에 나눠 담았다. 그 위에 어란과 두부 간 것을 끼얹었다. 세 개의 그릇은 각각 하늘, 자연, 사람을 뜻한다. 하늘은 검은색 칡소스, 자연은 노란색 유자소스, 사람은 머루와 오미자로 만든 붉은색 소스를 썼다. 임 씨는 벌레 먹은 담쟁이 잎을 각각의 그릇에 넣었다. 하늘 그릇에 들어간 잎은 벌레들이 하늘에 하는 이야기, 자연은 계절의 변화, 사람은 고난의 인생이라는 점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어느 것이든 떠먹으면 가을향이 입안에 가득.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